백암온천 길 끝 양떡·음떡마을
땅 기름져 작물 풍성 복받은 곳

평해교를 지나 백암온천, 영양 방면으로 난 88번 지방도는 끝이 없을 듯 이어진 목백일홍 가로수 길이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이라 하지 않았던가. 분명 열흘 가는 붉은 꽃이 없다 했건만 어인 사연을 품었길래 긴긴 여름 백일 동안이나 붉은 꽃잎 열병처럼 피워 댄 것일까. 약속처럼 껍질을 벗고 겨울 초입의 골 깊은 마을로 이방인을 안내하는 저 군상들. 스산한 바람이 불어도 떨굴 낙엽 한 잎 달지 않았다. 뜨거운 맨몸이다.

백암온천 부근에서 왼쪽으로 난 좁은 길을 따라 양떡, 음떡마을로 간다. 갈대 무성한 남아실 거랑이 안내하는 길 끝에 두 마을이 모습을 드러낸다. 울진군 온정면 온정리. 양지마을 혹은 양남아로 불리는 곳은 1리요, 음지마을 또는 음남아로 불리는 곳은 2리다. 남아실 다리를 사이에 두고 마주 보며 사는 이 마을은 근래 들어 지역에서 나는 약초와 농산물을 이용해 음·양 체질에 따라 시루떡을 만드는 체험행사를 열면서 양떡, 음떡마을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첫 추위에 바짝 긴장한 것은 텃밭이나 사람이나 매 한 가지, 촌부들의 손길이 분주하다. 집집마다 무청이 걸리고 가지런히 쌓은 장작더미가 높아졌다. 배추를 묶고 콩을 터는 마당으로 소금 자루를 배달하는 경운기 소리 크다. 마을의 좁은 골목엔 노란 택배회사 차가 서 있다. 이 집 저 집 공들여 지은 곡식이며 채소들이 대처로 나가 사는 자식들에게로 갈 채비를 한다.

“이곳은 남아실의 성황당을 중심으로 수령 600여 년의 느티나무 숲이 우거진 천여 평의 한적한 공간, 천 년을 이어 살아 온 조상님들 정성이 담겨 있고 혼이 머물러 있다. 이에 유서 깊은 이 공간을 주민들이 뜻을 모아 정결하게 다듬어 공원을 조성하여 남아실 성황당 공원이라 이름하노니 선조의 정서가 서린 안식의 공간으로 남아실의 운명과 함께 할 지어다, 1994년 7월26일”

양떡마을 한 쪽에 너른 공터가 있다. 느티나무, 회나무, 팽나무 등 한 눈에도 수백 년의 수령이 가늠 되는 고목이 우거지고 그 가운데 성황당이 자리하고 장수를 상징하는 우물터가 있는 이 공원은 양떡, 음떡마을 사람들에게 성지(聖地)이자 오래된 휴식터다.

“성황당에는 할배, 할매를 모시고 있지요. 옛날부터 정월대보름 전 날이면 양쪽 동네 어르신들이 죄다 모여 제를 지냅니다. 돼지를 잡던가 소를 잡던가 떡과 갖가지 음식을 해서 제를 올리고 나면 온 마을 사람들이 나눠 먹지요. 또 양력 8월15일에는 광복 기념행사를 아주 크게 열어요. 6.25 사변 이후에 잠시 주춤하기도 했지만 줄곧 해 온 행사입니다. 어르신들은 만세를 부르고 젊은이들은 음식을 장만해 잔치를 하지요. 그 밖에도 온정리엔 동네로 나쁜 기운이 들어오는 것을 막아주는 동구신도 있고 산신당도 있어요. 요즘 젊은 사람들은 미신이라고 하겠지만 그런거 하고는 다르지요. 자연 속에 믿고 의지할 것이 있으면 마음이 든든하잖아요.”

마당에서 장작을 패던 전인걸(67세)씨는 이곳을 복 받은 동네라고 했다. 장뇌삼, 나물, 참나무 숯을 자연으로 부터 사시사철 얻고 땅이 기름져 농사가 잘 되며 큰 비가 와도 고이거나 넘치지 않는 곳이기 때문이다. 마을 깊숙이 난 길을 따라 성곡교 오른편으로 접어드니 소담한 산신당이 있다. 금줄이 휘날리고 누군가 따라 놓은 막걸리 한 잔에는 가랑잎이 떨어져 있다.

“옛날에는 동네 사람들이 소 한 마리씩 다 멕였어. 어른들은 들일을 하고 주로 총각들이 소를 돌봤지. 그때 나이 많은 총각을 대총각이라 했는데 그가 지휘를 했어. 소가 나락을 뜯어 먹던지 곡식을 먹던지 하면 장날마다 모여 누 집 소가 누 집 나락을 얼마 먹었다 일일이 세알려서 벌금을 매겼지. 참 동네 법이 무서웠어. 안 내고는 못 배겼으니까. 그라고 정월 보름날에는 나물, 떡, 밥 여러 가지 음식을 해서 소한테 갖다 줬지. 어무이가 정성껏 차려서 외양간 소 앞에 내려놓으면 온 식구가 무얼 먼저 묵나 들바다 봤지. 소가 무엇에 입을 먼저 대는가를 보며 다음 해 농사의 풍년과 흉년을 점 쳤던 거야. 밥을 먹으면 풍년이 든다고 했고 나물을 먹으면 흉년이 진다 했던가? 하도 오래전 일이라 가물가물 하네. 사람 상 만큼은 아니었지만 제법 공들여 차렸던 것 같애. 그기 무신 정답이었겠나. 보름 음식 장만하는 겸에 고생한 소도 좀 멕이고 뭐 이래저래 기대는 거였지. 그 뿐인가. 이 골짜기에서 광복도 맞고 사변도 지났지. 아이고, 말도 마. 일제 때 내가 소태국민학교를 다녔는데 일본 선생들이 조선말을 쓰면 막 혼내고 했어. 사변 때는 북한군도 오래 머물렀지. 나갈 때도 여기와 있다 가고 드갈 때도 여길 들렀다 갔지. 나올 때는 그래도 해코지가 적었는데 후퇴할 때는 부상자 끌고 집집마다 쑤시며 난리를 직이곤 했어.”

양떡마을에서 나고 자란 김형순(74)씨는 어린시절 남아실 거랑을 생생하게 추억한다. 물이 맑고 깊이가 적당해서 놀기에 좋았다. 음지마을 양지마을 아이들이 어울려 꺽지, 퉁수, 메기, 피라미, 묵지 등 물고기를 잡느라 해 저무는 줄 몰랐고 돌멩이를 들추면 고들고들한 다슬기가 까뭇하게 붙어살았다. 산등성이로 일찌감치 해가 넘어가면 눈부신 빛살에 거랑이 한껏 빛났다. 어느 해 큰 태풍이 지나고 난 뒤 거랑의 모습이 바뀌었다. 제방을 쌓은 후에는 아무리 큰 비바람이 와도 더 이상 범람은 없었다. 하지만 전에 없던 갈대가 남아실 거랑 전체를 점령했다.

잡초 하나도 `지심`이라 부르는 사람들, 조상의 산소를 벌초 할 대도 `풀을 벤다`가 아니라 `풀을 내린다`는 표현을 쓰는 사람들, 나무 한 그루도 어른처럼 공손히 대하는 사람들이 사는 마을로 서둘러 저녁이 온다. 갈대밭이 휘도는 남아실을 사이에 두고 양떡마을과 음떡마을이 서로 초겨울 산자락을 이불로 덮어준다.

권선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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