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이 살았다는 단룡굴 사룡굴…큰 말 형상 닮아 거마장 마을
진주 강씨 김해 김씨 터잡은 마을 곳곳 해묵은 사연들

경주시 감포읍은 지형이

감(甘)자 모양으로 생겼고

또 감은사(感恩寺)가 있는

포구라 하여 감은포라 부르다가

음이 축약되어 감포(甘浦)라고

칭하게 되었다고 한다.

포구의 향취가 물씬 풍기는

조그마한 읍내에 닿자

그 이름만큼이나 달디 단

바람이 불었다.

갯바위가 많아 해산물이 풍부한

전촌리 일대는

재미있는 이름의 마을이 많다.



성(城)의 머리 부분에 해당한다는 성두(城頭)마을, 고세마을, 운촌(雲村)이라 부르기도 하는 구름마을, 소바짐, 말의 형상과 관련 있는 거마장(居馬場)마을, 외지인들이 들어와 새로 생겼다는 새마을, 해안의 나루가 나정리에 이르도록 길다하여 붙은 이름 장진(長津)마을 등이 그러하다. 마을이 품은 갖가지 사연들은 아쉽게도 자료에 상세히 기록되지 않았지만 그곳에서 나고 자란, 그리고 고요히 늙어가는 사람들의 마음 속 갈피갈피에 차곡차곡 쌓여 있다. 더더욱 다행인 건 소소해서 더욱 빛나는 말씀들을 다름 아닌 앞바다가 귀 기울여 듣고 있다는 것이다.

“높은 산에서 바라보면 큰 말이 있는 형상이라 해서 거마산 주변을 거마장, 혹은 거마끝이라 불렀지. 신라시대엔 왜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병마가 주둔했다고도 해. 몇 년 전 마을 입구에 말 모양의 동상이 떠억 하니 선 걸 보면 그 말도 맞는가봐. 저기 거마장 부근에는 단룡굴과 사룡굴이 있는데 용 한 마리가 살았다 하여 단룡굴, 용 네 마리가 살았다고 사룡굴이란 이름이 붙었어. 촛대바위 근처 시누대숲 뒤에 있는 오목한 단룡굴에는 말이지….”

장진마을에서 나고 자란 최두원씨는 여든 나이에도 정정했다. 팔도강산 모르는 것이 없다 하여 별명이 `최팔도`라 불린다는 그는 보고 듣고 겪었던 이야기들을 줄줄 풀어냈다. 그를 따라 거마산 자락을 오르는 내내 전촌항의 풍경이 눈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이곳은 진주 강 씨와 김해 김 씨들이 터를 잡은 곳이야. 누가 먼저인지 나는 잘 모르지만 아직도 두 문중이 각자의 명맥을 이어가지. 아주 옛날, 그러니까 임진왜란 때 말이야. 진주 강 씨 문중에 맘씨 곱고 효성이 지극한 처자가 살았어. 처자는 왜적으로부터 자기 아버지를 살리려고 거마산 단룡굴에 아버지를 모셨다네. 그리고는 끼니때마다 물을 길러다 밥을 지어 공양을 했지. 생각해 봐. 그게 어디 말처럼 쉬운 일이겠어? 그러던 어느 날, 처자가 물동이를 이고 거마산 기슭을 내려가다가 그만 발을 헛디뎌 굴러 떨어져 죽고 말았어. 단룡굴은 거마산 바닷쪽 벼랑에 있어서 매우 가파른 바위 사잇길을 지나야 하거든. 그 마음이 불쌍하고 또 갸륵하여 문중에서 처자의 효성을 기리는 무덤을 만들고 비를 세웠지. 그러나 소복하던 봉분은 세월에 무너져 이제는 야트막하니 흔적만 남아있어. 훗날 그 아버지의 묘 또한 처자의 묘 곁에 썼는데 위치가 참 좋아. 부녀가 나란히 거마산 둔덕에 누워 전촌항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편안해 보여. 옛날에는 비석이 자그마했는데 풀 뜯던 소가 뿔로 떠받는 바람에 갓이 떨어졌고 그래서 새로 세웠지. 아, 우리 어릴 적에는 말이지. 그 단룡굴에 들어가 가수가 되겠다고 백년설, 남인수, 고복수의 노래를 고래고래 불러대기도 했어. 거기서 노래를 부르면 마치 강당에 든 것처럼 우우 소리가 울리고 꽤나 잘 부르는 것 같이 들렸거든. 가수가 된 놈은 한 놈도 없지만 말이야.”

최두원 씨의 안내로 찾은 단룡굴은 약 1미터 30센티 가량의 높이로 길이가 약 5미터 가량 되는 어둑한 굴이었다. 굴의 앞쪽엔 시누대숲이 있어 숨기에는 좋았으나 경사가 가파르고 위험했다. 이곳에 아버지를 모셔 놓고 물동이를 이고 오르내렸을 딸의 마음과 바로 이곳에서 금쪽같은 딸의 죽음을 맞아야 했던 아버지의 마음이 아직도 바람으로 파도로 거마산 주변을 맴돌고 있는 것만 같았다.

단룡굴에 얽힌 이야기 뿐 아니라 거마산 구석구석에는 김해 김 씨와 진주 강 씨 두 문중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었다. 바랜 글씨가 적힌 비석과 입 다문 무덤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았고 후손들이 정성으로 다듬은 잔디가 그랬다. 눈을 감고도 거마산을 훤하게 읽을 정도로 최두원씨의 발e±¸음은 산에 익숙했다. 그를 따라 거미줄을 걷어내고 쓰러진 고목을 쓰다듬으며 해안에 이르자 네 마리의 용이 살았다는 사룡굴이 나타났다. 등줄기를 타고 땀이 흠뻑 흘렀다. 젖은 바위를 손으로 발로 짚어가며 다가갔다. 제법 크고 높은 바위 사이로 난 서너 개의 입구로 연신 파도가 들었다. 그 소리가 몹시도 우렁찼다. 물이 들지 않을 때는 반석이 드러나 여러 사람이 들어가 앉을 수 있는 공간이 생기고도 남을 곳이었다. 임진왜란 때도 6.25 사변 때도 마을 사람들은 사룡굴로 피신을 했다. 해안길은 끊어져 보이지 않고 오로지 산길을 통하지 않으면 닿을 수 없었으므로 원주민이 아니면 알 수도 갈 수도 없는 곳이었다.

다시 기슭을 올라 오래 된 포구나무 그늘에 앉아 사룡굴을 바라보았다. 굴곡 많은 시대를 만날 때마다 그곳에서 견딘 시간과 사람들은 멀리 흘러갔다. 하지만 남은 사람들이 전하는 이야기는 숨을 놓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은 거마산에 있는 작은 재만당과 큰 재만당에서 단룡굴과 사룡굴을 대상으로 정월 초하루와 유월 초하루, 1년에 두 번 정성스런 제를 지냈다. 무형의 전설에도 마음과 몸을 의지하고 그것의 안녕과 나의 안녕을 함께 빌던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풍습마저 사라졌다. 오래전 기억들을 풀며 앞장 서 걸어가는 노인의 어깨 위에 바람은 갈참나무 낙엽을 올려놓았다.



(계속) 권선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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