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량한 구월 하늘 아래 호미곶 파도는 참 신나게도 논다. 멀리, 붉고 흰 등대를 돌아 입항하는 태창호를 은빛 갈매기 떼가 호위한다. 새벽을 밀며 바다로 나갔던 사람들의 눈부신 귀환이다. 태풍 기운으로 일주일 만에 나간 조업은 다행히 만선이다. 배 밑바닥에서 크고 작은 문어를 들어 올리는 김헌길 (57세)씨의 그을린 얼굴에 가을 햇살이 쏟아진다.

“인자는 감으로 잡습니더. 사람도 더우면 응달로 가고 추우면 양달로 간다 아입니까. 또 많이 모여 있는 곳에 무슨 일로 있는가 싶아가 한 번 기웃거리게 되는 법이고요. 문어도 고기도 똑 같니더. 수온이 차면 위로 올라오고 더우면 밑으로 내리갑니다. 그라고 호미곶 돌문어는 억수로 이쁘니더. 내한테 밥을 주는 놈인데 우찌 안이쁘겠능교. 이쁘고 말고지요.”

그는 11월 한철 참복잡이를 빼고는 사시사철 호미곶 앞바다에 문어잡이 배를 띄운다. 어르신도 모두 배를 탔으니 3대 째 어부로 살아 온 셈이다. 오남매 중 맏이였지만 할아버지도 외동, 아버지도 외동인 집안이었다. 일가친척이 없다는 것은 서글프고 외로운 일, 게다가 일찍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여덟 식구의 살림은 가난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고등공민학교를 잠시 다녔지만 대보면에 중학교가 생기면서 고등공민학교는 문을 닫았다. 결국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열다섯 살 어린 나이에 처음 머구리배를 탔다.

역할은 선원들의 밥을 해주고 잔심부름을 하는 화장이었다. 밥 짓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한 철 꼬박 타야 쌀 한 가마니 남짓한 벌이였으나 대가를 받는 건 뿌듯했다. 천성이 바지런한 탓이기도 했지만 선원 대부분이 마을 어른들이라 그를 극진히 챙겨주었다.

“머구리배는 아침에 나갔다가 날이 안 좋으면 들어오고 좋으면 저녁에 들어오고 그랬니더. 밥으로 폴폴 성글게 담으면 좀 남았는데 그것을 손으로 꾹꾹 눌러가 동생들에게 갖다 주곤 했지요. 동생들이 졸로리 나와 배 닿기를 기다렸다 아입니까. 그 쌀밥 냄새, 참 좋았습니다.”

1년 남짓 머구리배를 탄 뒤 그는 오징어 배를 타기 시작했다. 오징어 스무 마리가 20원 하던 시절이었다. 선주들 모르게 몇 마리씩 팔아 그 돈을 집에 보냈다. 쉬이 나아질 리 없는 형편이었지만 부모에게도 동생들에게도 몫을 하는 것 같아 기뻤다. 가난이 어린 자식을 바다로 내몬 것 같은 심사가 부모에게는 평생 옹이로 박혔을 것이다.

한 손으로 노를 저으며 수경으로 바다를 들여다보고 문어를 만나면 갈고리로 끌어 올리는 청경발이에서 낚시를 놓아 문어를 잡는 형식으로 조업의 형태는 변했지만 호미곶 해안은 이 방법을 쓰기엔 해안 지형이 적절치 않았다. 모래가 없고 유독 바위가 많은 탓에 낚시 줄은 늘 끊어지고 문어는 속 시원히 잡히지 않았다. 얼핏 경남에 가면 통발을 이용해 문어를 잡는다는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포항에서 식육점을 하는 사람이 갖고 있던 `순양호`라는 배를 선장이었던 이수만씨와 빌려 어느 정도의 세를 주고 통발을 이용한 조업을 시작했다.

장비가 없던 시절이라 산을 보고 바닷길을 찾았다. 뒷산과 앞산의 꼭대기와 꼭대기를 똑바로 맞춰 갔고 삼각형 꼭짓점이 닿는 곳에 통발을 놓곤 했다. 공책에다 산을 그리고 표시를 하기도 했다. 호미곶 문어가 말도 못하게 많았다. 통발마다 문어가 들기 시작하는데 나날이 한 리어카씩 올렸다. 문어 뿐만 아니라 잡어도 들었다. 신나는 날들이었다. 엄청 벌었다. 그러나 작업이 잘 되니 4~5개월 쯤 지나 배 주인이 직접 하겠다고 했다.

배를 탄 지 10여 년 만에 드디어 자신의 배를 가졌다. 모은 돈을 집에 주고 싶었지만 또 흩어지고 말 것이 뻔했다. 실패할 경우 빚에 빚이 얹어진다는 두려움도 있었지만 한 편으로는 잘 할 수 있을 것 같은 확신이 끊임없이 다녀갔다. 결국 구룡포 사라 끝에 조그마한 배가 하나 났다는 소리에 통통배를 구입했다. 둘이 타고 낚시를 놓아 문어를 잡는 작은 조롱발이였다. 좋았다. 버는 만큼 내 것이었다. 배 구입을 반대하던 아버지도 돈을 모아 스스로의 배를 마련한 자식이 기특했으리라.

`한수호`, 원래 배 이름을 그대로 썼지만 잊지 못할 첫 배의 이름이었다. `한수호`와 1년을 함께 바다에 나가 벌어들인 돈은 빚을 갚고도 배를 하나 장만할 만큼이었다. 조금씩 배의 크기를 늘였다. 살 때는 105만 원에 샀지만 120만원에 팔았다. 고기를 잘 잡는 배는 재수가 좋다는 미신 탓에 조금 더 주고도 쉽게 사갔다. 그는 작업이 잘 안 되는 배를 싼값에 샀다. 잘 다듬어서 기술을 믿고 시작했다. 그만큼 수입이 좋았고 자신감도 늘었다. 이젠 만들고 싶었다. 목선이었다. 조선소는 비쌌으므로 도목수를 고용하고 아버지와 함께 만들었다. 부산 가서 나무를 깨고 들여와 말리고 뚝딱거리며 만든 배 `행왕호`, 강사리 해봉사에 가서 이름 넣고 시 때를 넣어 지은 이름이었다.

“옛날 아동 영주 그 짝에 주막이 하나 있았는데 말이시더. 과거보러 가는 사람들이 그 주막에 들러 가 문어를 묵고 가믄 마캐다 급제를 한다는 설이 있었다 캅니다. 또 문어 다리가 여덟 개니 팔자를 고쳐서 돌아온다는 야그도 있었지요. 그라고 `동지 문어 약 문어`라는 말 들어 봤능교? 크리스마스부터 1월 1일까지 잡히는 문어는 보드랍고 꼬들꼬들하니 최고시더. 문어가 게, 전복 할 것없이 온갖 좋은 건 다 먹고 사는데 삶은 물에 매운 고추 쫑쫑 썰어 넣고 파 송송 썰어 마시면 마 속이 개운하니더.”

끼걱끼걱 태창호 정박한 포구에 노을이 진다. 우연찮게 친구들과 놀러왔다가 그만 발목을 붙들린 고운 처녀, 시부모 모시고 시동생들 치다꺼리에 이제 뱃일에서 손 떠나지 못하는 아내는 어느새 반백이 되었다. 노대바람 지나고 명주바람 맞으며 동생들 자식들 잘 거두어 훌훌 대처로 방류한 그 또한 한 척 배다. 문어를 실어 보내고 난 뒤 문어 통발에 든 이시가리, 도다리, 참가자미 몇 놈 쓰윽 쓰윽 회를 떠서 이웃과 소주 한 잔 시원하게 친다. 둘러 앉은 얼굴마다 호미곶 푸른 바다가 싱그럽게 출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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