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룡포에 정착한 일본인들은 본격적으로 그들만의 사회를 만들어 갔다. 바다에서 잡아 올리는 수자원을 보관하기 위해 마을 곳곳에 우물을 파고 저장고를 지었다. 정신문화의 계승을 위해 신사와 절을 지었다. 그리고 학교를 세웠다. 얼마 전 폐교가 된 동부초등학교는 일본인들이 자녀들을 교육하기 위해 세운 심상소학교였다. 심상소학교는 훗날 지금의 중학교 과정인 고등과를 신설하고 조선인 자녀 서너 명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어른들의 치열하고 격동적인 움직임에 비해 정착촌에서 태어난 아이들의 일상은 매우 평범했다. 몇몇은 조선인 친구들과 유년의 깊은 우정을 쌓기도 했다. 1918년 구룡포에서 태어나서 평생 토박이로 살아 온 서상호(93세)씨는 그들과 보낸 어린 시절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日人들 신사와 절 학교 등 짓고 그들만의 정신문화 계승 본격화

조선 어부와도 공생 관계… 겉으론 평온

“여름이면 구룡포 해수욕장이나 근처 바다에서 고기도 잡고 수영도 했지요. 겨울이면 어울려 썰매를 탔구요. 돌아다니며 철사를 구해서 썰매를 만들어 장터 앞 거랑에 가서도 타고 논에 물을 막아서도 탔습니다. 형편이 좀 나은 아이들은 일본 나막신에 날을 달아 스케이트를 탔지요. 어스름 저녁 무렵 헤어지면 다음날 아침 다시 만나 놀곤 했습니다. 나카이시라는 친구가 있었는데 배우지도 않은 한국말을 아주 잘했어요. 나카이시에게는 서너 살 위의 형이 하나 있었는데 그 역시 조선말을 술술 했지요. 어디서 주워들었는지 몰라도 심지어 우리 옛날이야기까지 재미나게 들려주곤 했는걸요. 다른 일본 친구들과는 일본말로만 대화를 해야했지만 나카이시와는 조선말로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했어요”

그 시절, `나나`라고 불리던 처녀들이 있었다. 그들은 일본인 집에 파출부로 들어갔는데 주 일거리는 아이를 봐주는 것이었다. 나이가 15~16세 정도의 어린 처녀들이었는데 일본인 집에서 거주하면서 아이를 보는 경우는 드물었고 대부분 아침에 일본인 집으로 들어갔다가 저녁 9시경이면 돌아왔다. 나나들은 약간의 보수를 받고 일을 했는데 한두 달이 지나면 특별한 일본어 교육을 받지 않고도 일본말을 유창하게 했다. 그들이 `나나`라고 불린 이유는 맨 처음 그 일을 맡은 처녀의 이름이 `란` 혹은 `난`으로 끝나 `란아` 혹은 `난아` 라고 부르던 것에서 서서히 `나나`가 되었고 후엔 그 일을 하는 모든 이들을 총칭하는 대명사가 된 것이다.

“일본인들 은 10월 15일경이면 아끼 마쯔리라는 가을 축제를 크게 벌였습니다. `미꼬시` 또는 `오미꼬시` 라며 나무로 만든 빈 가마를 메고 온 동네를 돌아다녔지요. 가마를 멘 청년들이 좀 잘 사는 집을 찾아가면 주인은 술과 떡 같은 음식을 내놓았어요. 그렇게 온 골목을 요란스레 돌고는 날씨가 제법 쌀쌀한데도 가마를 멘 채로 바닷물에 뛰어 들었습니다.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그들이 `와쇼이!` 혹은 `와세이` 라 외쳤는데 어른들은 조선시대 통신사가 일본에 갔을 때 “왔소!”라고 한데서 유래 되었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또 추절 행사 때는 온 동네가 집집마다 처마 끝에 고운 단풍잎 같은 낙엽을 만들어 빙 둘러 달고 등불을 달았어요. 빨간 단풍잎을 단 처마도 멋졌지만 밤이면 불을 밝히던 등불도 장관이었지요. 그렇게 온 동네가 치장을 하고 한 사나흘 정도 들썩거렸는데 신사에서 시작해서 신사에서 끝났습니다. 마쯔리축제는 순전히 일본인들만의 축제였어요. 조선사람들은 해코지를 하지도 않았고 방해도 하지 않았지요. 그저 구경만 했습니다”

반면 조선인들은 음력 8월16일이면`들구경`이라는 행사를 했다. 추석 다음날이면 온 마을 사람들이 마을 입구의 용두산 고개로 올라갔다. 어른 아이할 것 없이 삼정골이고 성동이고 몰려오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좀처럼 바깥나들이가 없었던 처녀들도 그 날만은 잘 차려입고 나섰다. 전날 추석 명절에 준비한 음식을 들고 오는 사람도 있었고, 오랜만에 만난 사돈이나 일가친척들이 삼삼오오 이야기를 나누며 올라왔다. 좀처럼 들판 구경이 힘든 바닷가 사람들이라 가을 동산에 올라 눌태리 쪽 들판을 바라보는 들구경은 아주 인기가 좋았다. 누가 언제 시작했고 언제 끝이 났는지는 모르나 그리운 추억이다. 들구경에는 일본인들이 참여하지 않았고 순전히 조선인들만의 행사였다. 마쯔리를 구경하던 조선인들처럼 일본인들은 들구경을 지켜보며 흥미로워 했다.

일본인들은 주로 어스름한 저녁 무렵에 결혼식을 했다. 따로 식장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주로 자신의 집 2층에서 했으므로 자세한 절차나 광경은 볼 수가 없었다. 하객이 북적이지 않았고 차분하고 조용하게 치렀다. 또 그들은 함께 살던 이웃이 죽으면 화장을 하는 장례를 치렀다. 상여는 시신을 눕힌 직사각형인 우리나라 상여와는 조금 달랐다. 일본인들의 상여는 마치 가마처럼 정사각형에 가까운 형태였다. 그들은 시신을 바르게 앉힌 채로 가마에 태우고 가서 화장을 했다. 그러나 축항을 만들고 나서 지금의 구룡포 화장장 앞에 새로 화장장을 만들고는 그들 역시 시신을 눕히는 형태로 바꿨다. 아마도 사망 후 시신을 앉은 자세로 유지하는 것이 번거로웠기 때문이리라. 이러한 변화는 공존하는 세월이 길어지면서 섞인 문화의 대표적 예다. 지금의 동부초등학교 부근에 일본인들이 만든 납골당이 있었는데 패전 후 일본으로 돌아가면서 모두 가져갔다. 그러나 구룡포 공원 옆 대나무 숲에는 무덤이 하나 남아 있다. 당시 신사의 제주였던 사카이 어머니의 무덤이다. 사카이는 당시 80세가 넘는 나이였는데 본국으로 떠나면서 무슨 연유인지 어머니의 무덤을 챙기지 못했다. 나이가 연로한데다가 느닷없이 닥친 상황에 경황이 없던 탓인지도 모르겠다.

구룡포에 거주하던 양측 어민들의 관계에서 특별히 드러나는 부딪침은 없었다. 조선인들은 그들로 인해 활기를 띄기 시작한 항구의 모습에 협조했고, 일본인들은 텃세를 부리지 않고 자신들을 호기심으로 지켜보던 조선인들과 공생의 지혜를 발휘했던 탓으로 보인다. 그러나 내면적으로는 약간의 두려움과 호기심 속에 서로가 서로를 끊임없이 경계했으리라는 느낌도 버릴 수가 없다. <계속>

* 이 글은 2009년 3월, 소설가 조중의씨와 필자가 공동 집필하여 발간한 `구룡포에 살았다(도서출판 아르코)`를 바탕으로 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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