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보다는 덥지 않았다. 8월말의 기후치고는 제법 선선했지만 검은 돌풍을 예상치 못한 하루의 시작이었다. 여자 마라톤의 루프코스는 표고차가 400m 내외인 대구 시내를 도는 길이었다. 지겨운 레이스와 평탄한 코스는 트랙에서 잔뼈가 굵은 선수들이 심리적으로 유리하리라 예상했다.

여자마라톤은 9시에 출발선의 해프닝으로 시작되었다. 마의 35km 지점을 고비로 케냐 선수들은 일제히 치고나갔다. 스피드를 우위로 자신만만하게 페이스를 조절해가며 다른 선수들을 견제하며 앞으로 빠져나간 케냐 선수들은 전혀 힘들어 보이지 않는 자세로 달렸다. 여자마라토너의 질주는 가볍고 사뿐사뿐해 무용을 보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인데, 어느새 저 만치 멀어져 가 있었다.

2시간 13분 50여 초 무렵, 급수대에서 동료에게 걸린 키플라갓 선수가 넘어졌다. 많은 사람들이 아쉬운 탄성을 내지른 장면이었다. 본의 아니게 발을 건 체로프 선수는 얼마나 미안했으랴. 그녀들의 발자국에는 가난에 절망하는 가족들의 기대가 담겨있었음에 키플라갓과 체로프 선수는 그 순간 무슨 생각이 떠올랐을까? 고난의 질주는 쏟아진 물병처럼 주워 담을 수 없으리라 여겼을까? 달리면서 표현하는 미안함, 염려 말라는 격려는 질주 속에서 이뤄졌다. 골인점에 먼저 도착한 `맏언니`는 `동생`들을 기다렸다가 미소로 꼭 안아주었다. 키플라갓 32세, 제프투와 체로프 27세로 평균연령 28.6세였다.

1964년에 영국에서 독립한 케냐의 키플라갓 선수는 국제대회 첫 우승지가 19년 먼저 독립한 나라의 국채보상공원임을 알고 있었을까? 연도에 격려의 박수를 보내준 `친절한 한국사람`들이 독립과 동시에 국교를 맺은 친구임을 알고 있었을까?

케냐는 마사이마라를 비롯한 공원이 많다. 내셔널지오그래픽 채널에서 더 익숙한 그 나라의 고원지대에는 장거리 달리기에 우수한 육체를 가진 칼렌진 족 젊은이들이 매일 쉬지 않고 달린다. 가난의 한과 아프리카의 울분을 안고 그들은 뜨거운 동료애로 어깨를 나란히 견제하고 격려하며 탁월한 팀워크로 다른 나라 선수들을 `몰이`하는 작전에 아주 능숙하다.

아침부터 검은 바람을 몰고 온 케냐의 장거리 종목은 저녁에 완벽한 기록을 써냈다. 사실 마라톤보다는 여자 1만m가 더 관심이 가는 종목이었다. 여자 1만m는 런던올림픽과 다음 대회의 마라톤을 엿볼 수 있다. 5천m와 1만m 선수 출신으로 성공한 키플라갓 선수를 보듯이 여자 1만m는 관심을 끌고도 남았던 것이다.

그동안 1만m는 남녀를 불문하고 에티오피아를 위한 무대였다. 에티오피아로서는 중장거리 여왕 티루네쉬 디바바의 불참은 불행한 일이지만 29분대의 멜카무가 있었다. 그러나 케냐에는 2009년 베를린 대회 `10년 에티오피아 시대의 종지부`를 찍은 리넷 마사이를 비롯해 베를린대회 5천m 우승자이자 케냐 선발전 1위로 자신감 넘치는 체루이요트, 케냐 선발전 4회 탈락을 딛고 일어선 올 시즌 랭킹 1위 킵예고가 버티고 있었다.

디바바가 빠진 에티오피아는 케냐에게 포위된 셈이었다. 멜카무는 베를린에서 마사이에게 패한 경험이 있었다.

마사이의 지난 대회 우승으로 한 명이 더 출전한 케냐 팀은 믿기 힘든 힘과 스피드로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하늘색 몬도 트랙을 달렸다. 체루이요트의 금메달부터 4위까지 휩쓴 폭풍 속에 에티오피아의 멜카무는 간단하게 `사냥` 당해 버렸다. 보스턴 마라톤에서 케냐의 11연패를 저지한 이봉주의 나라에서 그들은 그날 모든 메달을 휩쓰는 기적을 연출했다. 체루이요트 28세, 킵예고 26세, 마사이 22세로 평균 25.3세로 마라톤 선수들보다 3.3세가 젊다. 다음 대회에서는 이들이 마라톤 시상대에 서 있을지도 모른다.

남자 마라톤도 케냐의 강세를 예상해본다. 세계기록 보유자인 에티오피아의 게브르 셀라시에, 비공인 세계기록 보유자인 케냐의 무타이가 불참했지만 2009년 베를린대회 챔피언으로 2연패에 도전하는 아벨 키누이, 역시 2시간 5분대의 빈센트 키프루토가 나선다. 다만, 1만m에서는 에티오피아의 베켈레가 5연패를 노리고 있어 케냐로서는 이변을 기대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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