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 구룡포 일본인 가옥 거리
하시모토 - 도가와 日 양대세력 이끌어
심한 알력 빚다 방파제 축조 명분 제휴

일본 어민들에게 어업권을 인정해 주기 시작하면서 1912년 구룡포 정착 일본인 가옥은 47호가 되었고 1916년에는 78호로 크게 늘어났다. 많은 사람들이 어업과 관련된 다양한 업종으로 부를 축적하였다. 그 중에서도 눈여겨 볼만한 인물은 하시모토 젠기치와 도가와 야스브로. 구룡포 거주 일본인의 양대 세력은 크게 가가와현 출신의 어민들과 나머지 타 지역에서 유입된 일본인들로 나뉘어졌다. 하시모토 젠기치를 중심으로 하는 가가와현 출신들은 초기 개척 당시부터 주도적으로 임해온 터라, 뒤에 유입된 타 지역 어민들을 배척했다. 구룡포 거주자의 절반 가까이가 가가와현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세력은 대단했다. 이에 반해 타 지역 각지에서 들어 온 어민들은 가가와현 출신의 기득권 주장과 텃세에 맞서 대응했다. 그들이 내세운 중심인물은 오카야마 출신의 도가와 야스브로였다.

가가와현 출신의 하시모토는 가이코호, 지요호, 다카호 등의 선박을 소유하고 구룡포를 기점으로 경북, 경남의 연안은 물론이고 관동지방까지 무대로 활동했다. 훗날, 선어운반업과 더불어 대형낙망과 건착망(고등어와 정어리 등을 잡는 그물 어구)어업과 정어리 가공공장까지 경영하면서 막대한 재산을 모은 하시모토는 가가와현 출신 어부중 최고의 부를 이룬 사람이었다. 그는 재력을 바탕으로 가가와현 이주민들의 리더역할을 했다.

하시모토와 비슷한 시기에 구룡포로 진출한 도가와 야스브로. 1875년생인 그는 불과 27세의 젊은 나이에 1902년 구룡포 남쪽 모포리에 정착하였다가 6년 뒤인 1908년 도로개설이 보다 쉽고 수산업기지로 전망이 밝다고 구룡포로 거주지를 옮겼다. 1908년 당시 포항으로 이주해 정착한 오카야마현 사람들은 95호나 되었다. 도가와는 포항에 자리잡은 고향사람들과 교류하며 금융기관, 권력, 경제 등 다방면으로 인맥을 넓힌 탓에 하시모토와 견줄만한 충분한 위치가 되었고 가가와현을 제외한 타 출신 이주민들 중 대표가 되었다.

일본인 집단촌은 외형상 보기엔 평화로워 보였다. 그러나 속으로는 알력과 세력 다툼으로 인해 두 패로 나뉘어져 있었다. 마을이 점점 번창할수록 상권은 물론 의사결정권에서도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갈등이 표면화됐다. 하시모토를 회장으로 하는 가가와현민회와 도가와를 회장으로 하는 타 현민회는 매사에 맞서 갈등을 일으켰다. 마을의 일을 할 때도 의견이 충돌했다. 간혹은 다툼도 벌어져 부상자가 발생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후, 팽팽하게 맞서던 두 세력이 손을 잡은 것은 항만건설이라는 염원 때문이었다. 자연항인 구룡포는 거친 파도를 막아 낼 시설물이 전무해 풍랑이 거세지거나 폭풍이 불어 닥치면 속수무책이었다. 어선이 전복되고 많은 사상자들이 속출했다. 파도가 주택가까지 덮쳐 골목길을 통행하지 못할 정도였다. 하시모토와 도가와는 제휴를 결심했다. 서로의 명분을 지킬 수 있을뿐만 아니라 구룡포의 미래가 달린 사업이라 걸림돌이 될만한 것은 없었다. 그들은 `구룡포축항기성동맹회`를 조직했다. 회장은 도가와 야스브로가 부회장은 하시모토 젠기치, 이사는 마츠이 나카이치시가 맡았다. `축항기성동맹회`가 조직되기 이전인 1918년 도가와는 스스로의 힘으로 경북도로부터 지원을 받아 방파제 축조에 나선 경험이 있었다. 도가와의 재력과 하시모토의 인맥을 동원한 구룡포 거주 일본인들은 항만 축조에 뛰어들었다. `가가와현 해외출어사`에 따르면 1921년 1월 공사비 약 3만 엔을 투입해 항구 북동쪽에 면적 2천333평을 매립하는 공사를 시작하였고 1922년부터 3년 사업으로 35만 엔을 투입해 이미 매립해 놓은 항구 북동쪽 용주리부터 방파제를 설치해 나갔다. 공사비는 조선총독부로부터 12만 엔, 경북 도청으로부터 13만 엔을 지원 받았고 나머지 자금은 창주면(현재 구룡포읍)과 일본인거주민들로부터 조달했다.

지금의 병포리 부근 용두산 자락은 온통 돌산이었다. 얼마 전 허물린 펭귄통조림 공장까지 커다란 바위가 이어져 있었는데 그것을 깎아 축항을 만드는데 사용했다. 돌을 깎고 흙을 퍼내는 중장비가 없어 레일을 깔고 수레에 돌을 실어 날랐다. 일일이 사람의 힘으로 바다를 메워 나갔다. 수없이 많은 조선인들이 공사에 투입되었다. 공사는 1926년 끝났고 182m의 방파제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 방파제로 구룡포는 어업근거지의 기본적인 여건을 갖추게 됐다. 방파제 축조로 선박의 항내 정박이 안정되자 부산에서 원산을 오가는 여객선과 부산에서 울릉도를 오가는 여객선의 중간 항구가 되었다. 1차 방파제 축조가 끝났지만 하시모토와 도가와는 너무 작다고 판단해 1931년 경북도 민자 사업의 일환으로 나머지 방파제 공사를 마무리하기로 의기투합했다. 당시 경북도 평의원으로 활동했던 도가와의 영향력과 로비도 큰 도움이 되었다. 1932년 2월부터 총 공사비 59만 엔을 투입해 방파제 확축매립공사를 시작했다. 그 후 3년 뒤인 1935년 3월 70m의 방파제를 연장하고 재해복구연장 명목으로 135 m의 공사를 추가했다. 이때서야 구룡포항의 현재 모습이 갖추어진 것이다.

훗날, 하시모토가 발기인이 되어 도로와 축항건설에 많은 공로를 세운 도가와의 업적을 기리기 위한 송덕비를 1944년 구룡포 공원에 세웠다. 도가와가 언제 사망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송덕비가 세워진 연도를 가늠하면 그는 해방 이전 구룡포에서 사망한 것으로 짐작된다. 도가와는 생전에 6남매를 두었으며 장남 카오루는 1912년 구룡포에서 태어나 1945년 패전을 맞아 일본으로 돌아갔다. 그 후 도쿄에 거주하며 구룡포에 살았던 사람들로 구성된 구룡포회를 이끌어 오다가 2005년 93세의 일기로 사망했다. 그의 딸 오오구로 카요코(2008년 당시 74세)는 일본 오사카 사카이에 살고 있었다. 그리고 하시모토는 1944년 도가와의 송덕비를 세우고 난 뒤 그 해 구룡포에서 사망했다. 이국의 항구에서 한 시대를 주름잡던 화려한 생도 세월을 비껴갈 순 없었다. 서서히 다가오는 패전의 기운을 그들은 과연 감지했을까? <계속>

* 이 글은 2009년 3월, 소설가 조중의씨와 필자가 공동 집필하여 발간한 `구룡포에 살았다(도서출판 아르코)`를 바탕으로 쓰여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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