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환 `ASIA`발행인·작가

올해는 일제 식민지시대에 중국 동북지역에서 한인 독립군을 양성했던 신흥무관학교 개교 100주년이다. 딱히 그것을 기념하려는 뜻은 아니었지만, `일본 천왕의 신민(臣民)`으로 전락한 조선인들이 `만주`라 불렀던 중국 요녕성(랴오닝성)을 두루 돌아다녔다. 버스에 몸을 싣고 대련, 여순 감옥, 단동, 통화, 유하, 심양(옛 봉천) 등에 차례로 머물렀다가 다시 대련으로 돌아온 그 여정은 총 2천100km로, 한국(남한) 육지의 테두리를 따라 한 바퀴 도는 것과 맞먹는 거리였다.

만주 곳곳에는 망국 시대를 감당한 조선인의 피와 땀과 눈물이 배어 있었다. 이제는 그 터마저 옥수수 밭으로 변한 신흥무관학교는 피와 땀과 눈물로써 민족정신을 깨우고 가꾸며 미래의 희망을 부여잡은 독립투쟁의 상징이었다. 1909년 만주에 독립군 기지를 건설하기로 결의한 신민회(新民會)의 `신`자와 부흥할 `흥(興)`자를 합쳤던 신흥무관학교를 세운 주역은 널리 알려진 대로 우당(友堂) 이회영(1867~1932) 선생의 여섯 형제와 이동녕(1869~1940) 선생이었다.

대련과 그 이웃의 여순. 이 지명은 우당 선생과 악연이었다. 대련 항구에서 체포돼 1932년 11월 여순 감옥에서 사형을 당했던 것이다. 안중근(1879~910) 의사가 31세 청춘으로 생을 마쳐야 했던 여순 감옥은 어느덧 관광 상품의 주요목록에 올라 있었다. 2층에는 우당 선생과 신채호(1880~1936) 선생의 얼굴이 걸려 있었다. 흑백사진이었다. 그러나 그분들의 영혼이 찍힌 것 같았다. 현대도시로 급성장한 단동. 조선인들이 `안동`이라 불렀던 국경도시는 고통을 강요했다.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6·25전쟁 때 미군 폭격기가 끊어놓은 압록강 철교였고, 또 하나는 압록강의 중국 쪽 강가를 따라 즐비하게 들어선 불야성 빌딩들과는 너무 대조적으로 반딧불이 같은 불빛도 하나 없이 칠흑에 묻혀버린 강 건너 거대한 어둠이었다.

압록강 한복판으로 흐르는 조·중의 보이지 않는 국경선. 60년 전 압록강 철교를 폭격한 미군 조종사들은 중국 국경을 넘지 않으려고 얼마나 긴장했을까? 중국 쪽의 것은 멀쩡하고 북한 쪽의 것은 흔적 없이 사라진 `절반의 철교`, 이 관광 상품 옆에 새로 세워진 철교가 중국과 북한을 이어주고 있지만, 절반의 철교야말로 조·중 혈맹관계의 가장 확실한 증거물이요 상징물이었다. 철교 들머리에는 중국군이 항미(抗美) 기치를 치켜세워 북한으로 진격해 들어가는 조각상이 지키고 있고, 끊긴 철교의 끄트머리에는 중국군의 활약상을 담은 영상물이 결코 끊기는 것을 용납하지 않을 기세로 끊임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다시 대련으로 돌아온 마지막 밤, 정신의 한 구석이 불편했다. 무엇하러 나흘 동안 2천100km를 돌아다녔단 말인가. 조상들의 피와 땀과 눈물의 자취를 확인하고 공경심을 더 높이기 위하여 그랬단 말인가. 이것이 견딜 수 없이 싫었다. 기어코 불편한 속내를 토로하고 말았다.

“만주 벌판에서 온갖 고초를 극복하며 200개나 되는 민족학교를 세우고 독립자금을 대주고 독립투쟁을 했다. 이것은 역사의 위업이고 귀감이다. 그러나 지금 여기서 우리는 자신을 향해 매서운 질문 하나를 반드시 던져야 한다. `왜 독립운동이 필요 없는 나라를 만들지 못했을까?` 바로 이것이다. 일본은 1860년대에 명치유신 투쟁을 했다. 우당 선생이 태어난 그 무렵이다. 그때 조선의 지식인은 무얼 했나? 결국 50년 뒤 식민지가 됐다”

서울의 주민투표가 끝났다. 양보와 타협을 용납하지 않는 것은 피의 혁명이다. 주민투표는 민주적 방식인 것 같아도 양보와 타협을 배제한다. `학생들 점심밥 문제`로 정치집단이 이념투쟁의 혁명적 수단을 동원한 격이었다. 끔찍한 일이었다. 박형준 대통령특보가 기획하고 오세훈 서울시장이 수용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그들의 머리에도 `나쁜 투표` 거부운동을 기획한 인간들 못잖게 `80년대 운동권적 습성`이 똬리를 틀고 있는 모양이다. `복지표퓰리즘`을 비난하고 `복지만세`를 외치는 양측 `머리들`에게 말하고 싶다.

“당신은 당신의 그 오래된, 이제는 습관적이고 정파적으로 변질된 이념적 편향에 갇혀서, 그 관념의 감옥 속에서 당신이 과거에 말했던 것에 얽매여 그것을 기억하는 자들의 비판을 두려워하며, 어쩌면 당신이 죽은 뒤나 50년쯤 뒤에 당신의 혼백이 고독하게 통곡할 그 어떤 결정적인 후회들을 만들고 있지 않는가? 그것들의 하나를 나는 말할 수 있다. 습관적이고 정파적이고 헤게모니 쟁탈적인 관념의 감옥에 갇힌 탓으로, 이해와 관용이 결핍되어, 양보와 타협의 문화를 일구지 못한 채 마치 피의 혁명이라도 할 것처럼 설쳐댄, 바로 그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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