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 구룡포 일본인 가옥 거리

2008년 초가을, 가가와현 오다무라에 사는

마츠모토 시게노리(88세)를 만났다.

그는 구룡포에서 19살 까지 살다가

패전과 함께 돌아와

고향에서 와인 공장을 하며 살고 있었다.

마츠모토가 들려준 이야기와

챙겨준 자료, 사진 등은

일본인 가옥 거리에 대한

실마리를 푸는데 상당히 도움이 되었다.

이후에도 그는 각지에 흩어져 있는

`구룡포회` 사람들을 연결해 주었는데

그들의 회고록과 출어사등 당시 기록물을 통해

서서히 당시의 풍경이 일어서기 시작했다.



日 어부들에 부 안겨준 동해 황금어장

구룡포 정착 사연엔 침탈의 역사 흔적



“정어리 떼가 몰려오는 날이면 그 뒤를 수십 마리의 고래가 따라왔는데 물을 뿜어 올리는 모습이 장관이었다. 정어리는 너무 많이 잡혀서 육지에 내려놓으면 산더미처럼 쌓였고 고등어는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걸려서 배가 침몰하는 경우도 있었다.”

“배와 그물이 모두 불안전한 것이었지만 어획량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하룻밤에 1천 여 마리의 삼치를 잡았는데 그물을 거두면 배가 가라앉고 배를 침몰 시키지 않으려면 그물을 버려야했다. 어부들은 어쩔 줄 몰라 했다”

후쿠오카현에 속한 지역 오시마의 촌사편찬위원회가 출어의 실태를 오래 기록으로 남겨 놓기 위해 좌담회를 열고 그 내용을 기록한 `오시마촌사`에서도 당시 어획량이 얼마나 많은 부를 안겨주었는지를 보여준다. 오시마 어부들은 폭이 5척 1촌, 길이가 20척에서 25척 남짓한 1인승 배로 삼치잡이에 나섰다. 부산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삼치를 찾아 북상하여 경상북도 구룡포를 근거지로 경북, 경남, 강원도 일대 먼 바다에까지 나가 조업을 했다. 삼치가 정어리를 먹고 기름을 토해 낸 것을 표적으로 삼치 떼를 찾아냈다. 많이 잡힐 때는 이른 아침 불과 1시간 만에 85마리~115마리가 줄줄이 낚였다. 무게는 700돈에서 1관이나 됐다. 삼치가 뛰놀 때는 그 부근 일대가 붉은 빛을 띄게 되는데 솟구쳐 뛰어오르는 모습이 장관이었다. 이렇게 잡은 삼치는 하야시가네 상점의 모선이 전표를 내주고 사들인 다음 얼음에 재워 교토로 보냈다. 삼치 한 마리에 보통 80전, 최고일 때는 2엔까지 했다. 전표를 받고 삼치를 넘긴 어부들은 구룡포로 들어와 사무소에서 돈으로 바꾸었다. 어선이 만선으로 들어오는 호어기 때는 1인당 300엔 정도를 품에 안고 고향으로 돌아간 사람도 많았다. 당시엔 80엔의 돈으로 폭 6자(약 30.30CM) 3치(3,03CM)의 3인승 배를 만들 수 있었으니 어부가 삼치잡이로 벌어들인 300엔은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금액이었다.

그렇다면 통어를 하며 조업을 하던 일본 어부들이 어떤 계기로 구룡포에 정착하여 맘껏 바다를 누비며 조업을 할 수 있었고 우리는 왜 한반도 동남쪽 황금어장을 고스란히 그들에게 내어줄 수밖에 없었을까?

오다촌 바닷가 산중턱에 있는 `조선출어자 공로비`에는 `1883년 가가와현 쓰다에 사는 사나이 다다기치, 구마기치, 요시로 삼형제가 돌아가신 아버지의 뜻을 받아 쓰시마에 어로를 나갔다가 유명산에 올라 조선 반도로 가고자 하는 뜻을 세웠다. 1년 뒤인 1884년 운송선으로 거제도로 가서 만선으로 각지에 운송했다`는 내용이 있다. 또 다른 자료에는 `1880년 경 오다와 지척에 있는 쓰다의 구마기치, 와다 두 명이 칼과 총을 지참하고 도미연승(도미를 잡는 그물)을 가지고 출어했다` 는 기록이 있다. 그게 사실이라면 가가와현 어민들이 조선해에 출i?´하기 시작한 것은 1880년에서 1884년 사이가 된다. 그렇다면 조일통상장정으로 조일 어업관계 조항이 규정되기 이전부터 일본 어부들은 공공연하게 조선해를 상대로 조업을 했다는 것인데 이는 엄연한 침탈이다.

1883년 7월 `조일통상장정`이 체결되었다. 양국 어부들은 서로의 해상으로 출어를 할 수 있다는 규정에 따라 일본인의 조선해 조업은 이전까지 밀어(密漁) 또는 불법이었던 것에서 합법적인 통어(通漁)로 인정된 셈이다. 그 후 1908년 11월 `한일어업협정`이 체결되면서 일본 어민들에게도 조선 어민들처럼 어업권을 인정해 주게 됐다. 이때부터 일본 어민들이 조선 땅으로 진출해 이주어촌을 건설하는 정착 어업시대가 된 것이다. 일본은 왜 조선정부에 무리한 어업협정을 요구해 자국 어민들의 조선해 출어를 적극 도운 걸까? `가가와현 해외출어사`를 보면 세토내해 연안 어장의 주요부분은 특권적인 수부조합에 의해 점유되어 있었기 때문에 자유로운 공동어장은 좁고 열악했다. 어구는 발달하였고 작은 물고기까지 잡아들인 탓에 어장은 자원이 고갈 되었다. 또 세토내해는 사면이 각 어장과 접해 있어 복잡한 분쟁이 늘 끊이질 않았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는 길은 세토내해를 벗어나 경합이 없는 넓은 어장으로 출어하는 것이었다. 어자원이 풍부한 조선해, 특히 구룡포 인근 바다는 그야말로 그들에겐 유토피아였던 셈이다.

그렇다면 조선 어부들도 일본해에 진출하여 맘껏 조업을 했을까? 1900년 초 한국 주요 어장은 왕실 궁내부의 직할 어장과 부호 양반들의 독점물이었다. 그나마 주요어장이 아닌 어촌의 경우 대부분 어민들은 소규모 자가 어업으로 고기를 잡고 시장에 내다 팔아 생계를 유지했다. 게다가 당대 어부의 사회적 신분은 하층민에 속했다. 사대부는 물론이고 평민들까지 어촌지역과는 혼사도 하지 않을 정도였다. 이들에게 진취적인 기상과 어업기술의 발전을 기대하기란 애당초 힘든 일이었다. `조선통상장정`은 일본 어민들과 동등한 조건으로 우리 어민들의 일본해 출어를 보장해 놓았지만 당시 조선의 어업 현실로는 처음부터 불가능한 것이었다. 우선은 열악한 어구와 어선으로 수천 리 험난한 바닷길을 가야하는 출어 자체가 어려웠다. 여기에 풍족한 조선 어장도 한몫 했다. 굳이 먼 바다로 나가지 않아도 되었으므로 원양에 대한 진출의 필요성을 몰랐다. 가가와현 오다 어부들이 구룡포에 쉽게 안착할 수 있었던 것은 `한일어업협정(1908)`을 계기로 한. 일 간에 형성된 시대적 상황과 구룡포 주민들의 사회, 경제적 역학관계 등 복합적인 것이 맞물렸기 때문이리라. <계속>





* 이 글은 2009년 3월, 소설가 조중의씨와 필자가 공동 집필하여 발간한 `구룡포에 살았다(도서출판 아르코)`를 바탕으로 쓰여졌습니다.

권선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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