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하댐과 임하호 (좌) 이건 후의 정재종택(우)
정재종택(定齋宗宅)의 본래 자리는 현재 임하호 한가운데가 된 임하면 수곡(水谷) 2리에 있었다. 정침, 대문채, 사당, 외양간채 등으로 구성된 이 건물은 퇴계 이황의 학문을 계승한 전주 유씨 무실파 정재 류치명(定齋 柳致明)의 종가로 정재의 증조부인 류관현이 조선 영조 11년에 세운 집이다. 이곳에 있던 종택이 수몰되지 않고 현 위치로 이건돼 보존될 수 있었던 데는 사연이 있다.

1986년 임하댐 건설사업이 시작되면서 이곳의 수몰민은 이주해야 할 처지에 놓이게 된다. 그러자 250년 이상 이곳에 터전을 잡고 살아온 종택이 막상 수몰이 된다고 하니 후손들은 망연자실할 뿐이었다. 농지는 그나마 보상을 받아 다른 곳으로 옮기면 되지만 건물의 이건(移建)은 보상을 받지 못하면 엄두도 못 낼 지경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건 보상비를 받을 수 있는 수단으로 종택의 문화재지정은 후손들에겐 절체절명의 일이었다.

당시 필자는 안동댐 수몰지역 지표조사를 시작으로 안동 임하댐, 영천 자양댐, 청도 운문댐 등지의 수몰지역과 깊은 인연을 맺고 있었다. 임하댐 지표조사 당시 송현 김일진 박사(전 영남대학교 교수)를 중심으로 그 문도의 필자와 당시 박사과정의 장석하(현 경일대학교 교수), 백영흠(현 대구대학교 교수), 조영화(현 대경대학 교수), 정명섭(현 경북대학교 상주캠퍼스 교수), 이호열(현 부산대학교 교수), 변숙현(현 청도 한옥학교 교장), 곽동엽(현 대진대학교 교수), 하종한(현 경남도립거창대학 교수) 등이 지표조사팀으로 구성 된다.

필자가 경상북도 문화재 전문위원으로 활동하던 당시 문화재지정조사 보고서에는 칼라 사진을 사용하던 때다. 그런데 정재종택은 관리를 잘 하기 위한 마음에 후손들이 근년 니스칠을 많이 한 탓에 사진만 보면 마치 새집처럼 보였다. 건물의 내력이나 역사성은 문화재로 지정하기에 손색이 없을지 모르지만 칼라사진에서는 원형변경 등의 오해를 살 여지가 있었다. 중요한 것은 건물이었다. 필자는 고민 끝에 흑백사진으로 다시 찍어 보고서를 제출하게 된다.

문화재지정심의위원회 당일 위원장은 “왜 이 집만 흑백사진이냐?”고 질문해왔다. 필자는 “하필 그 때 준비한 칼라 필름이 다 떨어져 부득이 그러했노라”고 답변을 할 수밖에 없었다. 위원장(故 김영하 박사)이 크게 웃으시면서 이는 필시 조사자의 고건축에 대한 건축적 애착이 깊은듯하니 문화재로 지정하자고 위원들에게 청했다. 곡절끝에 정재종택은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52호로 지정돼 수몰 전 수곡2리 마을 바로 뒷산 정재 류치명의 묘 바로 곁에 무난히 이건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인연을 맺은 정재종택은 후일 필자의 학위논문 서론에 인용할 정도가 되었고, 당시 종부(故 이숙경 여사)가 집안내력으로 내려온 `송화주`를 담기라도 하는 날이면 필자와 포항공대 초대학장 故 김호길 박사를 함께 불러 주곤 했었다. 비가 유난히 많은 올 여름, 새삼 정재종택의 사랑마루에 앉아 송화주를 마시며 옛 수곡2리를 담고 있는 `임하호`를 내려다보고 싶어진다.

/영남이공대 교수

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

저작권자 © 경북매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