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동규 시인이 지금껏 펴낸 여러 권의 시집 가운데 필자가 가장 좋아하는 시집이 바로`꽃의 고요`이다. 표제시 `꽃의 고요`를 읽어본다.

“일고 지는 바람 따라 청매(靑梅) 꽃잎이/눈처럼 내리다 말다 했다./바람이 바뀌면/돌들이 드러나 생각에 잠겨 있는/흙담으로 쏠리기도 했다./`꽃 지는 소리가 왜 이리 고요하지?`/꽃잎을 어깨로 맞고 있던 불타의 말에 예수가 답했다./`고요도 소리의 집합 가운데 하나가 아니겠는가?/꽃이 울며 지기를 바라시는가,/왁자지껄 웃으며 지길 바라시는가?`/`노래하며 질 수도……`/`그렇지 않아도 막 노래하고 있는 참인데`/말없이 귀 기울이던 불타가 중얼거렸다./`음, 후렴이 아닌데!`”

`꽃의 고요`를 두고 부처님과 예수님이 한 자리에서 친구처럼 말씀들을 나누고 계신다. 부처와 예수가 함께 등장하는, 그것도 서로 농하듯이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시로 만들어진 것은 우리 문학사에서 황동규 시인의 13번째 시집 `꽃의 고요`가 처음이 아닌가 싶다. 종교 간의 반목과 질시도 심한 우리 시대에 부처와 예수가 한 `생명`에 관한 말씀을 나누고 있는 이 장면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자신의 시 속에 부처와 예수의 말씀을 빌려오는 것을 황동규 시인은 어떻게 생각해냈을까. 그 말씀들로 미혹(迷惑)하고 한계적 존재인 우리 인간의 삶과 죽음의 깊은 문제를 실감나게 그려내고 있는 시집 `꽃의 고요`가 나는 참 좋다. 꽃이 진다는 것은 한 생명이 다른 생명으로 건너감이다. “고요도 소리의 집합 가운데 하나가 아니겠는가?”라는 예수님의 말씀과 꽃이 질 때 “노래하며 질 수도…”라는 부처님의 말씀에 내 마음의 모든 문을 열고 놓고 오랜 생각에 잠긴다.

/이종암(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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