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철소 건설로 물속에 묻힌 고향
생계 찾아 뿔뿔이 타향살이 설움

한국 철강 산업 발전의 꿈은 1960년 대 종합제철 건설 계획 수립으로 구체화 되었다. 비록 자본 기술 경험도 없는 무의 상태였지만 박태준 사장을 비롯한 34명은 1968년 4월1일 회사 창립식을 갖고 일관제철소 건설의 대장정을 시작하였다. 1970년 1기 설비 착공식을 가진 포항제철소는 3년 만에 1973년 7월 3일 준공식을 가졌다. 당시 송정리 일대 주민들은 이주 마을인 연일 새마을동네나 해도동 일대에 조성된 주택, 또는 도구 일월동 부근으로 터전을 옮겼다. 그러나 103만t 체제의 1기 설비로는 우리나라의 철 소요가 절대 부족하였고 그에 260만t 체제의 제2기 설비 확장을 계획하였다. 그리고 부족한 공장 부지를 확보하기 위해 형산강 하류의 땅을 이용하기로 하고 1974년 형산강 유로(강 하구의 물줄기)를 포항 시가지 쪽으로 변경하기 시작했다. 75년 딴봉마을 쪽으로 물길을 돌리고 딴봉 일부의 토양을 퍼서 매립한 후 성토 작업은 끝났으며 이어 2고로 공사가 시작되었고 76년 5월31일 드디어 2기가 준공 되었다. 그 후, 경제 대국으로 가는 역동적 발걸음이 되었던 포항제철소는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기업으로 세계시장에 우뚝 섰다. 고향을 물속에 묻은 아픔은 아직도 가슴에 생생하지만 당시로선 어쩔 수 없는 시대의 선택이었고 거부할 수 없는 희생이었다는 딴봉 사람들. 36년이란 긴 세월 형산강 물줄기 무심히 흐르는 동안 딴봉사람들은 어떻게 살아 왔고 살고 있을까.

서른 초반 대가족과 이주한 사람이 칠순 바라봐

2007년 세운 `딴봉회관` 향수 달랠 유일한 공간

“주민들의 이주는 그리 길지 않았어요. 공무원들이 나와서 둘러보고 논과 밭을 기준으로 평당 2천800원 정도 책정된 가격을 통보 하였습니다. 형식상 합의 수용이 되자 이주가 시작됐고 마을 사람들은 각지로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했지요. 그나마 대책이 있었던 사람들은 서둘러 떠날 수 있었지만 막막한 사람들은 떠나고 싶어도 쉽게 움직이지 못했습니다. 밥을 먹다가 갈대울타리 너머를 바라보면 중장비가 길을 밀어내고 있었어요. 저도 울며 겨자 먹기로 300만원 남짓한 돈을 찾았지요. 하지만 앞날은 까마득했습니다. 송도와 해도에 집을 마련해 나가는 사람들도 있었고 1차 이주민들이 모여 사는 도구 일월동이나 연일 새마을 동네로 가서 세를 들기도 했지요. 대부분 고향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살며 형산강 물줄기를 바라보았지만 간혹은 대처로 떠나 소식조차 들리지 않았습니다.”

장맛비가 오락가락하던 날, 딴봉회관에서 석재화(67)씨를 만났다. 54평 남짓한 대지에 32평 규모로 지어진 그곳은 딴봉 사람들의 유일한 보금자리였다. 2007년 1월에 마련한 회관 벽에는 향수를 달래며 가진 모임의 단체사진이 차례차례 걸려 있었다. 노모를 포함해 열 명이나 되는 대가족을 이끌고 딴봉을 떠나던 서른 초반의 석재화씨도 칠순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다.

“배운 건 없고 푸성귀 심어 거두는 재주가 전부인데 그럴 땅도 없으니 할 일은 노동뿐이었지요. 그러나 그조차 쉽지 않았습니다. 불규칙한 일자리와 수입으로는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1977년 가족을 송도에 두고 배를 탔지요. 부산과 일본을 오가며 화공약품을 실어 나르는 삼부해운 3호였는데 봉급은 적었고 몰래 외제품 장사를 해야만 돈이 되었습니다. 그나마 그 재주도 없는 사람들은 뒷돈도 챙기지 못했고 독한 약품들을 취급하다보니 몸이 많이 상했습니다. 저도 1년 반 정도 배를 타고는 결국 송도로 돌아오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1년 후 다시 해외개발공사에 이력서를 내야했다. 그리고 김해 공항에서 오사카로 가서 배를 탔다. 일본서 철재를 싣고 미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에 풀어 놓고 다시 곡물을 싣고 돌아와 일본 각지에 풀어 놓는 배였다. 선주는 일본인이었으나 다행히 선장을 비롯한 27명의 선원은 모두 한국인들이었다. 덕분에 명절이면 배 위에서 명절상을 차리고 향수의 시름을 덜 수 있었다. 월급은 회사에서 직접 집으로 송금하였으므로 가족들에 대한 걱정은 조금 덜 수 있었다. 그리고 84년 겨울, 5년 남짓 탔던 배에서 하선을 하고 돈을 조금 만들어 송도에서 부동산 사업을 시작했다. 집을 지어 팔며 조금 일어서는 듯 했으나 위기는 인생살이 굽이굽이 끊이지 않고 왔다. 다른 사람들의 근황 역시 그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근근이 자망선으로 배사업을 하는 친구들과 청림, 도구에서 농사를 짓고 사는 이들도 있지만 서울, 강릉, 울산, 대구로 돈벌이를 찾아 떠난 이들은 쉽게 뿌리를 내리지 못한 채 객지생활을 하는 형편이었다.

“85년부터 딴봉마을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모임을 할 마땅한 장소도 없었지만 서로의 근황을 물으며 밥을 나누는 일은 행복했지요. 2006년 모임에서 우리 딴봉 출신의 유순자(67)씨가 마을회관을 건립하기로 마음먹고 사비를 털어 대지를 구입하고 건물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2007년 1월 지금의 딴봉회관을 준공 하였지요. 규모가 제법 컸던 1차 이주민들은 훗날 제철소의 지원으로 자녀들을 위한 장학회를 설립했습니다만 딴봉은 관도 회사도 지역사람들도 모두 잊어버린 마을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고향 딴봉은 잊어서도 잊혀서도 안 되는 포항 사람들 모두의 고향이고 역사입니다.”

형산강 둔치에 선 그의 가슴이 스르르 아프다. 어린 시절 추억이 생각나고 세월에 쉬이 늙은 몸이 야속하다. 6·25 사변 중에 북한군이 못 넘어 오도록 솔안다리를 끊었을 때 딴봉 둑을 따라 피난을 가던 사람들, 부녀자와 아이들을 배에 태우고 뱃머리를 붙들고 헤엄치며 넘어가던 사내들의 모습, 시체들이 둥둥 떠내려가던 그 강을 바라보던 딴봉이다. 어떻게든 함께 살아보자고 근대화의 물결에 삶터를 내어주고 물에 잠긴 내 마을 딴봉이다. 저 우뚝 선 공장에 가서 힘차게 망치질을 하고 싶은 꿈을 꾸던 사람들이다. 살로, 삘로떼가 날던 갈대밭은 다시 오지 못해도 후손 대대로 딴봉을 기억할 표석은 이 강가에 서야 한다. 바람이 그의 이야기를 물고 상류를 향했다. 비늘처럼 일어선 물결에 강이 꿈틀거렸다. 멀리 형산(兄山)과 제산(弟山) 사이로 노을이 지면 강 너머 포스코는 오색찬란한 빛을 밝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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