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는 돌아가지 못할 곳이다.”

모친은 딴봉을 돌아보며 그만 주저앉아 울었다. 옹기종기 어깨를 기대고 살던 낮은 슬레이트 지붕과 골목들이 지워지고 있었다. 푸성귀를 심어 밤낮으로 돌보던 밭도 파헤쳐졌다. 중장비들이 내는 소리에 갈대밭 살로 떼가 날아올랐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깨진 종바리까지 살뜰히 챙겨 수레에 실었지만 추억은 데려오지 못했다. 집과 땅에 대한 보상금 300만원으로 골든당 옆에 겨우 집 한 칸을 마련하고 열 식구의 세간을 풀었다. 하늘을 가린 지붕 아래 몸은 눕혔지만 막막했다. 아, 무엇을 해서 먹고 살아야 하나.

형산강 하구 물빛만이 잔잔하게 일렁이는 그곳엔 오래전 딴봉이 있었다. 따로 떨어진 봉긋한 마을이라 해서 딴봉이라고 했을까? 딴봉은 송도에서 둑으로 연결된 섬 아닌 섬이었다. 파도가 치면 물이 에돌아 나가던 곳. 강의 모래가 퇴적된 넓적한 땅 위에 약 100여 호가 옹기종기 살았다. 일제강점기때 심은 방풍림 소나무가 있을 뿐 능선 낮은 산도, 마을 어귀마다 부표처럼 선 오래된 당산 나무 한 그루도 없었다. 기와집 몇 채에 슬레이트나 초가지붕이 대부분이었던 가난한 마을, 초가지붕이 낡으면 연일이나 대송에 가서 나락 짚을 사다가 집집마다 새지붕을 얹곤 했다. 갈대를 베어다 울타리를 두르고 밭을 일구어 온갖 채소를 심고 바닷물을 받아 소금을 고며 온 몸으로 삶을 일구던 순한 사람들이 거기 살았다.

초여름이면 갈대숲으로 살로, 삘로라 불리던 철새들이 날아왔다. 자그마한 덩치에 다리가 가늘고 긴 회색빛 새들. 팽이치기 막대놀이가 싫증이 나면 아이들은 소총이나 말총으로 만든 덫을 들고 새잡이에 나섰다. 딴봉에는 말이 없었지만 죽도시장에는 짐을 실어 나르는 말이 많았다. 말총은 소총보다 훨씬 질겼으므로 아이들은 간혹 남빈동까지 말총을 뽑으러 가기도 했다. 궁둥이 쪽으로 살살 다가가 손가락으로 꼬리털을 감아 당기면 화들짝 놀란 말이 뛰었다. 아이들도 꽁지가 빠져라 달아났다. 그렇게 뽑아 온 긴 털을 한 줄로 이어 군데군데 올가미를 만들어 바닥에 놓고는 “살로야, 삘로야” 불러대며 살살 새떼를 몰았다. 새들은 쉬이 날지 않고 뛰듯이 걸었는데 어쩌다가 덫으로 놓은 훌치기에 발목이 걸리면 사냥은 성공이었다. 신이 나서 나무를 주워 다가 불을 피우고 입가에 검정을 묻혀가며 새를 구워 먹었다. 갈대밭을 뒤져 새알을 주워 깨 먹기도 하고 삶아도 먹었다. 물이 좋은 형산강에서 재첩과 조개를 줍고 고스라지를 낚으며 종일 놀다보면 상류쪽 하늘에는 붉은 노을이 번졌다.

딴봉 아이들은 영흥초등학교에 다녔다. 아침 일찍 둑길을 걸어 송도 솔밭을 지났다. 솔밭에는 고아원이 있었는데 아이를 잃어버리면 찾을 수가 없다고 할 만큼 울창했다. 봄이면 솔잎의 새순을 끊어 먹느라 지각을 하기도 했다. 봄풀들 사이로 삥기도 올라왔다. 삥기 속에는 솜처럼 포근한 것이 들어있었다. 맛있었다. 솔밭을 지나면 동빈내항을 가로 지르는 꺼먼 다리까지 은백양나무 가로수가 양쪽으로 나 있었다. 바람이 불면 은백양나무 초록 잎사귀와 뒷면의 은빛이 팔랑거리는 모습이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동빈내항 물줄기는 맑았다. 나뭇가지에 줄을 달아 넣기만 하면 물고기가 올라왔다. 보리가 자라면 보리서리를 했고 은백양나무 너머 밭에서 가지도 토마토도 몰래 따 먹었다. 수업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엔 송도 해수욕장으로 달려갔다. 한 여름 송도해수욕장은 언제나 발 딛을 틈이 없을 정도로 사람이 많았다. 긴 백사장 가득한 피서객들 사이를 비집고 첨벙첨벙 물속으로 들어가 놀았다. 어찌나 모래가 고운지 한 참을 들어가도 부드러운 촉감이 발바닥을 간질였다.

가끔 칠성천까지 가서 놀았다. 칠성천엔 돛을 단 배가 지나기도 했다. 배가 지날 때마다 돛이 걸리지 않게 들어 올리던 나무다리도 있었다. 겨울이면 꽁꽁 언 칠성천은 색다른 놀이터가 되었다. 종일 앉은뱅이 썰매를 타고 팽이를 치며 놀았다. 봄이 올 무렵 얼음이 녹기 시작하면 고무 얼음이라 부르며 서서히 꺼지는 얼음을 풀쩍풀쩍 건너다녔다. 간혹 굼뜬 녀석들은 얼음과 함께 빠지기도 했다. 그 추운 날, 모닥불을 피우고 쫄딱 젖은 옷을 말리면서도 행복했다.

배작업을 하는 집도 몇 있었지만 딴봉 사람들 대부분 채소 농사를 지었다. 그러나 작은 땅에 심은 채소들은 가계에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부추, 얼갈이배추, 시금치를 심어 부지런히 가꾸어도 열 식구 배곯는 날이 더 많았다. 여름철이면 아무리 아까워도 채소가 상하면 모두 버려야만 했다. 두 아들을 데리고 리어카 가득 채소를 싣고 죽도시장에 나가 팔아도 국밥 한 그릇씩 사 먹이면 남는 게 없었다. 갈대밭 가에 염전이 있었다. 바닷물을 태양에 말리는 서해안의 염전과는 소금을 만드는 방법이 달랐다. 흙을 평평하게 깔아 놓으면 그 위로 바닷물이 들어왔다 나갔다. 그러면 그 흙을 짜서 움막을 지어 놓고 흙에서 나온 바닷물을 어마어마하게 큰 솥에 고으면 소금이 되었다. 움막을 지었던 흙을 다시 깔아 바닷물이 들기를 기다렸다. 간혹 나무로 된 물레방아 비슷한 것을 발로 밟아 바닷물을 끌어올리기도 하였다. 바닷물 탓인 지 흙의 성분 탓인지 모르지만 소금의 질이 좋았다. 처음엔 누르스름하다가 이내 하얗게 변했다. 손가락으로 찍어 먹으면 짜디짠 소금도 달달했던 시절이었다.

사람들이 모두 딴봉을 떠나자 덩치가 큰 준설배가 마을의 모래를 퍼 날랐다. 작업 속도는 매우 빨랐다. 갈대도 자갈과 함께 퍼 올렸다. 간혹 물고기도 따라 나왔다. 할아버지가 세상 마지막 숨을 놓으신 딴봉, 아버지가 어머니를 맞아 첫 밤을 보낸 딴봉, 오랜 세월 굴뚝 연기로 저녁을 접고 다시 아침을 펴던 고즈넉한 강가 마을 딴봉이 사라지고 있었다.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새들의 여린 부리가 연신 모이를 쪼던 딴봉이 강물에 그렇게 덮여가고 있었다.

<계속>

글 권선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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