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통 수석에 빠져 살던 어느날
운명인 듯 화석과 기이한 만남

화석 수집가 강해중(70)씨는 포항에서 태어나 칠십 평생 포항에서 살아온 토박이다. 그는 일찍 부모를 여의고 철물점을 하던 누나의 일을 도우며 청년기를 보냈다. 포스코가 들어설 무렵 페인트사업을 시작으로 누나로부터 독립한 그는 건설현장의 친구들을 만나게 되었고 그들을 통해 문화에 대한 안목과 수집의 매력을 배웠다. 주로 오래된 민화나 그림을 수집했는데 고향의 정취를 담은 산과 강의 풍경은 평안함을 선물했다. 그러나 아끼던 그림들은 큰 물난리에 그만 엉망이 되고 말았다. 영원한 것이 없음에 허무했다.

사업이 번창할수록 마음은 조급해 지고 삭막해졌다. 그것을 달래려고 다시 택한 것이 자연 수석 수집. 틈 날 때 마다 포항 주변의 개울이나 하천을 돌며 돌을 주웠다. 오래된 마을의 담을 헐어내는 곳에서 운명처럼 만날 돌을 기다렸다. 큰 비가 오면 물이 빠진 뒤 모습을 드러낼 돌에 대한 기대로 잠을 못 이뤘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저 돌이라 여겼던 것들은 숨을 쉬는 개체로 다가왔다. 멀리 문경으로 남한강으로 그저 돌을 찾아다녔다. 돌은 아무말이 없었으나 돌에 새겨진 무늬들은 지나간 햇볕과 바람 그리고 물살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뜨거운 여름날 온종일 서성이던 강가에서 만나는 돌 하나는 총각이 한 눈에 반한 아가씨처럼 눈부신 설렘이었다.

수석 수집을 하던 중 우연히 만난 한 사람과의 인연은 화석으로 향하게 한 화살표가 되었다. 그는 미국에서 자연사 공부를 하고 자연사박물관 건립을 위해 서울로 돌아와 살고 있었다. 그의 집에서 본 생애 최초의 화석, 그것은 한 마리 물고기였다. 아름다웠다. 신비로웠다. 그리고 궁금했다. 모든 생명이 죽으면 썩어버리는데 물속에 놓아주면 금방이라도 헤엄칠 듯 선명한 물고기를 품은 돌의 형상이라니. 저것은 도대체 무엇이고 어디서 왔을까? 집으로 돌아왔지만 도무지 잠이 오질 않았다. 일주일 후 전화를 걸어 수집 경로를 물었고 그는 친절하게 알려 주었다. 뜻이 있다면 함께 공부한 사람들이 각자 자기 나라에 가서 자연사 박물관에서 근무하고 있으니 소개해 주겠다고 했다. 서른두 살에 만난 자그마한 물고기 화석은 현재 6천여 점의 화석을 수집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1970년대 초만 해도 일반인의 외국여행은 쉽지 않았다. 때마침 포항상공회의소위원으로 들어갈 계기가 주어졌다. 상공위원이 되면 공장 견학이나 기타 업무상 외국 방문이 가능했으므로 망설임 없이 가입했다. 외국행 일정에서 조금이라도 짬이 나면 가이드를 구해 현지 자연사박물관으로 갔다. 소장한 화석들을 구경하고 구입했다. 처음 구입한 화석은 독일의 삼엽충이었다. 원화로 약 36만 원가량을 지불하고 얻은 그것은 반짝반짝 윤이 나고 예뻤다. 품에 안고 돌아오는 내내 그저 귀한 것을 얻었다는 마음에 마냥 즐거웠다.

그렇게 브라질, 소련, 중국등 40여 개국을 쏘다니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화석을 수집했다. 현지에서 구입하는 것은 수월했지만 국내 반입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우선은 계산서가 없는 것이 문제였다. 분명 값을 치르고 샀으나 대부분 개인적으로 소장한 것을 구입하다보니 계산서가 있을 리가 없었다. 설명하고 또 설명했지만 매번 같은 사람이 신기한 돌덩이를 자꾸 날라오니 출입국 담당자들의 의심은 나날이 커졌다. 결국 조사를 위해 화석들을 맡기게 되었고 두 달 후에야 공항 관계자로부터 찾으러 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지질학회에 조사를 의뢰해야 했을 정도로 우리나라는 화석에 대한 관심이 저조했던 시절이었다.

인도네시아에서 나무 화석 규화목을 구할 때는 특히 고생이 많았다. 화석의 크기도 크기지만 한 달씩 체류를 하다보면 잠자리도 음식도 기후도 견디기 힘들었다. 게다가 섬에서 발굴 되는 실정이라 지역 사람들과의 소통을 위해선 이중으로 가이드를 구해야 했다. 돈이 관련된 일이다보니 위험 요소 또한 많았다. 어렵게 화석을 구해도 섬에서 섬으로 옮겨야 했다. 원시적인 방법으로 통나무를 엮어 뗏목을 만들고 산에서 큰 돌을 굴려 실었다. 한 번은 커다란 규화목을 싣고 옮기다가 그만 배가 기울었다. 다행히 사람은 다치지 않았으나 화석은 무게가 있어 물에 빠지고 말았다. 그 후 다시 그 곳을 방문해 인력과 장비를 동원해서 화석을 옮겼다. 부피가 큰 화석은 종합상사들의 도움을 받았다. 그들이 한국으로 들어올 때 컨테이너를 이용해 짐을 실어다 주었다. 어떤 경우는 6개월 만에 오고 후진국의 경우 1년 만에 운반해 올 때도 있었다.

수십 년 모은 화석들을 창고에 놔두고 혼자 보기엔 아까웠다. 솔직히 말하자면 자랑하고 싶은 욕심이 생긴 것이다. 화석을 모으는 일도 한심한데 많은 돈을 들여 박물관을 짓겠다니 모두 바보짓이라고 만류했다. 그러나 결국 포항에서 영덕으로 가는 7번 국도변에 장소를 잡았다. 바닷가 구릉지를 메우고 건물을 짓고 드디어 1996년 경보화석박물관을 개관했다. 한국 최초의 화석박물관이었다. 언론은 물론이고 학회에서도 관심을 보였다. 무엇보다 일반 관람객들이 화석을 보고 신기해하는 것이 기분 좋았다. 가족과 이웃도 그때서야 쏘다닌 세월과 바보스런 행보를 인정해 주었다. 그는 현재 영덕 경보화석박물관 이외에도 경주 엑스포세계화석박물관과 포항 호미곶새천년기념관내 바다화석박물관 등 세 곳에 각각 다른 테마로 화석을 전시하고 있다.

그에겐 모든 화석이 소중하다. 그래도 가장 아끼는 것을 꼽으라면 강원도 영월산 2억8천만년 전 고사리 화석이다. 끊어진 형태가 대부분인 열대지방 고사리 화석에 비해 자그마하면서도 아기자기한 원형이 그대로 잠들어 있기 때문이다. “수집은 큰 병이고 중독입니다. 젊은 날 벌어들인 그 많은 땅과 돈이 다 사라졌지요. 그러나 후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화석을 찾아 쏘다닌 세월과 고집이 자랑스럽습니다” 화석은 아름다운 흔적이다. 46억년 나이의 지구역사와 생태계를 푸는 열쇠다. 그는 요즘도 화석을 찾아다닌다. 하루살이가 이틀 사는 짐승의 세월을 모르고 백 년 사는 인생이 천 년 사는 생을 모르지만 화석은 길고 깊은 이야기를 들려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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