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은 평화롭겠지` 헤르브란트 바커르 지음, 신석순 옮김, 364쪽, 1만2천원

“내가 아버지를 싫어하는 이유는 아버지가 내 인생을 망쳐놓았기 때문이에요. 난 아버지가 내 인생을 더 망쳐놓는 것이 싫어서 의사도 부르지 않았어요.(….) 아버지는 몰라요, 헹크가 나한테 얼마나 소중했는지. 헹크하고 난 쌍둥이잖아요. 아버진 쌍둥이 형제가 어떤 건지 알기나 해요?” (246쪽)

“지난 10년 동안 발간된 작품 중 가장 아름다운 데뷔작을 썼다”는 찬사를 들으며 데뷔와 동시에 여러 문학상을 받고 네덜란드 문단의 기대주가 된 헤르브란트 바커르의 장편소설 `그곳은 평화롭겠지`(문학과 지성사 펴냄)가 출간됐다.

이 소설은 네덜란드 국내는 물론 여러 해외의 유명 잡지들에서도 각종 찬사를 받았으며, 이미 영국·독일 등 10개국에서 번역 출간됐을 뿐 아니라 영화로도 제작될 예정이다. 영어판 `쌍둥이`는 `2010년 국제 IMPAC 더블린 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찬송하는`그곳은 평화롭겠지`는 초록 잔디밭과 물, 새 그리고 고랑과 호수를 메운 얼음판, 소, 양, 고분고분한 당나귀 두 마리, 또 어느 뿔까마귀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하지만 광활하게 펼쳐진 그 자연은 인간을 외로움 속으로 빠뜨릴 수 있다. 그래서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농부가 되고 만 헬머의 이야기가 있는 것이다.

아비는 쌍둥이 동생 헹크를 편애했고, 그래서 동생이 아비의 농장을 물려받을 예정이었지만…. 어느 날 아비의 뒤를 잇는 운명이 헬머를 덮친다. 헹크가 사고로 죽은 것이다.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암스테르담 대학에서 문학도의 길을 걷기 시작했던 헬머는 학업을 포기하고 동생을 대신해 농장에 남는다.

반평생 동안 쌍둥이 동생이 살았어야 하는 인생을 대신 산 헬머. 그의 삶이, 미지에 대한 동경이, 과거에 대한 향수가, 이 책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샴쌍둥이라도 되어 한 몸이 되고 싶었던 동생과 함께 보낸 나날들은 돌아올 수 없는 그리운 과거가 되었다. 그리고 그는 동생을 잃음과 동시에 자신의 인생마저 빼앗겨버렸다. 반쪽짜리가 되었다고 느끼면서 수십 년을 자신에게 맞지 않는 인생을 살아왔다니…. 그렇지만 이 책은 슬픔을 호소하지 않는다. 그저 동생을 대신해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산 한 남자의 삶을, 그의 상념을, 그가 있는 네덜란드의 전원을 담담하고 차분하게 그려낼 뿐이다. 마지막으로 온전히 혼자가 되는 순간까지.

이 작품은 인간의 상처, 상실, 그리고 그리움과 갈망에 대한 이야기다. 누구나 자신에게 딱 맞는 인생을 살지는 않는다. 인생은 스스로 살아내야 하는 것이고. 그래서 외로운 여정일 뿐이다. 하지만 쌍둥이는 태어날 때부터 혼자가 아니다. 헬머는 늘 동생 헹크를 그리워했고, 농가에서 일하는 얍을 그리워했고 어머니를 그리워했다. 어머니마저 돌아가시고 아비와 단둘이 농가를 지키는 동안 헬머는 아비의 일손이 되었다. 그러다 아비가 병이 들어 몸져눕자 그는 스스로 농가의 주인장이 됐다.

물기가 흥건한 농토, 소들의 숨소리와 양들의 우는 소리만이 이따금씩 정적을 깨우는 전원에서 헬머는 농장의 가축들과 늙은 아비를 묵묵히 돌본다. 아비를 위로 `치워버리고` 아래층 거실과 안방을 분주하게 새단장하는 책의 초반부는 사뭇 뭔가를 새롭게 시작해보려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농가라는 자리는 헬머가 꿈꾸는 자리가 아닌지라 헬머의 마음은 그다지 가다듬어지지 않는다. 농장에, 병든 아비 곁에 묶여 세상에 대한 막연한 동경과 공상밖에 할 수 없는 헬머. 그가 갈망하는 땅, 덴마크.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방에 덴마크 지도를 걸어놓고 매일 밤 자기 전에 지명들을 읽어보는 것이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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