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화 / 경북여성정책개발원 연구위원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오늘도 옷고름 씹어가며 산제비 넘나드는 성황당 길에

꽃이피면 같이 웃고

꽃이지면 같이 울던

알뜰한 그 맹세에 봄날은 간다”

문득 살아온 날들을 돌아보면 대부분 기억하기 어렵지만, 선명한 몇몇 기억이 있다. 엄마의 무릎을 베고 누워 나른한 봄볕을 쬐던 어느 하루. 그날 오래 된 카세트를 통해 듣던 노래와 마음의 풍경이 내겐 그런 몇몇 순간 중 하나다.

엄마는 낡은 카세트를 통해 흘러나오던 그 노래를 흥얼거리시며 뜨개질에 여념이 없었다. 박남정, 이선희, 변진섭 뭐 이런 가수들의 노래와는 질적으로 다른 흑백영화에서의 성우 목소리 비슷한 아우라가 뿜어져 나오던, 그래서 마치 연기를 듣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듯한 느낌이 들게 했던 가수(훗날 그 가수가 백설희라는 것을 알았다)의 노래 가락과 그 가락을 따라 부르던 가냘프고 힘없는, 쓸쓸하고도 허전했던 엄마의 목소리. 나로서는 생뚱맞고 청승맞기 그지 없었던 그 노래가 엄마는 참 좋다고 했다. 테이프가 한 면을 다 돌아 칙칙 거리는 소리가 들리면 엄마는 또 돌려놓으시고는 뜨개질에 열중하였다. 비록 엄마의 체온을 느끼고 있었지만 웬지 나는 이곳에 있고 엄마는 아주 먼 저쪽 세계에 외따로이 있던 것 같은 느낌.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때 엄마의 삶은 무척 고단했을 것 같다. 넉넉지 못한 시골 형편에 쑥쑥 커가는 딸은 셋이나 되고…. 하루가 다르게 자라나는 아이들 모습 보면서 어떻게 뒷바라지를 해야할 지 걱정이 아닌 날이 없었을 거다. 부지런히 몸을 움직여야지 마음을 다지면서도 `쟤들을 학교나 다 마치게 할 수는 있을까?`, `혹시라도 아이들이 하고 싶어하는 걸 못해 상처가 남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으로 잠 못 이루던 밤들이 많았다는 걸 엄마는 내가 대학을 졸업할 때가 되어서야 고백하셨다. 물론 아주 철없는 아이는 아니었으니 집안 형편이 수월치 않다는 것도 그래서 잔걱정이 많을 거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돌아보니 엄마의 그 깊은 고민에는 한 치 닿을 수도 없었던 것 같다. 천성이 남들에게 폐 끼치는 걸 싫어하셨기 때문에 엄마는 호미 하나 빌리는 것도 힘들어 하시는 분이셨다. 그래도 어찌어찌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까지 진학하였으니 사실 엄마는 당신의 능력 몇 배의 몫을 해내셨다. 살아가다 보니 다 죽으라는 법은 없더라는. 어찌어찌 길을 다 열어주더라는 말로 지난 날을 회상하시며, 자식들 덕분에 힘든 줄도 몰랐다고 외려 고맙다고 하셨던 엄마.

이제 나도 자식을 둔 엄마가 되었고, 그 옛날 당신이 했던 것과 비슷한 걱정을 하며 하루를 보내고 짬짬히 당신을 생각한다. `엄마는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엄마라면 이럴 때 어떻게 했을까?` 놀라움과 감탄과 그리고 살뜰히 돌아보지 못했던 후회가 섞인 감정으로 엄마를 떠올린다. 더 많이 배우고 더 좋은 직장에 더 힘이 되어 주는 가족들과 함께 있지만 나는 여전히 미숙하고 자주 길을 잃는 엄마다. 철없을 나이엔 `나는 절대로 엄마처럼 살지 않을 거야`라는 생각도 여러 번 했지만,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나는 엄마를 닮고 싶다. 엄마처럼 살고 싶다.

`엄마를 부탁해`라는 소설 속 화자의 뼈아픈 독백처럼 그 때 나는 알 지 못했다. 지금 내가 엄마를 필요로 하는 것처럼 엄마에게도 엄마가 필요했을 거라는 걸. 엄마가 있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젊은 날의 당신이 엄마의 부재를 대신하며 스스로를 위로하며 불렀을 그 노래, 담담하기 그지 없던 그 노래를 이제 나도 즐겨 듣는다.

어찌하다 보니 올해는 바빠 제대로 연락 한 번 하지 못했던 무심한 딸이 5월을 보내며 뒤늦게 죄송한 마음으로 불러 드린다.

엄마 봄날이 가요. 그 때 그 노래처럼, 그 때 그 봄처럼….

저작권자 © 경북매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