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가정 평면도,관가정 사랑채
우리나라 전통 가옥은 아궁이에 부뚜막이 붙어있는 부엌(정지)이 안방과 함께하는 `日`자형 평면구조가 기본이다. 그런데 양동마을 관가정을 처음 찾았을 때 손씨 문중의 종가(宗家)로 알고 여느 때처럼 실측을 시작했는데 안방에 붙어 있어야 할 부엌이 없었다. 안채 좌우 어느 쪽에도 부엌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렇다면 관가정은 주생활 전용 주거공간과는 차별화 된 용도의 건물로 밖에 볼 수 없다. 몸채 안마당인 중정(中庭)에서 우익사 전면부에 우측 외부공간으로 드나드는 통례칸이 있어서 이곳을 따라 밖으로 나와 보니 어김없이 그곳에는 종가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사당이 내삼문과 함께 몸채 우측 배면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런데 통례칸을 지나다보니 사랑채 문간방 사이에 실내 아궁이가 있었다. 건물의 소유주는 이곳을 부엌이라고 말하지만 그곳에는 부뚜막도 없었고 더더욱 조선시대 반가(班家)의 사랑채에 정지 기능을 갖춘 부엌은 부설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 따라서 이곳은 소유주의 설명과는 달리 문간방에 단순히 난방을 하기위한 아궁이로 밖에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양동마을의 관가정은 사랑채 누마루 위에 걸린 편액 `관가정(觀稼亭· 보물 제442호)`이 말해주듯 이 건물은 살림집 기능으로서 보다는 넓은 안강 들녘에서 농사일 하는 것을 누마루나 사랑방에 앉아 여유롭게 관리하고 또한 종갓집의 일상사인 사당에 제사를 올리는 것을 고려해서 초창 때부터 주생활 위주 보다는 문중의 대소사에 필요한 공간 확충과 효율적인 들판의 농사 관리 기능을 갖춘 용도로 건축된 듯하다.

요즘 중요민속자료 제189호이던 양동마을이 2010년 7월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자 많은 사람들이 이 마을을 찾고 있다. 양동마을은 지금부터 553년 전인 1458년 청송에 살던 당시 25세의 손소(孫昭, 1433~1484)가 처가가 있는 이곳에 들어와 살면서부터 마을의 역사가 시작된다. 손소의 장남이 처가의 대를 잇게 되자 차남이 상속자가 되는데 그가 바로 우재 손중돈(愚齋 孫仲暾, 1463~1529)이다. 한편 손소의 외동딸에게 이번(李番·여주 이씨)이 장가들어 두 아들을 두고 일찍 사망하자 아들들은 외가인 양동마을에서 성장하게 된다. 그 맏아들이 회재 이언적(晦齋 李彦迪, 1491~1553)이다. 이때부터 양동마을은 손소의 후예인 월성 손씨 가문과 이언적의 후예인 여강 이씨 가문이 한 마을에 동거하는 양성씨족(兩姓氏族) 마을이 된다.

손중돈이 1514년에 건립한 관가정은 마을 입구 왼편에 전망이 좋은 언덕위에 있다. 관가정은 정면 5칸 측면 6칸으로 `口`자형 평면 구성을 이루고 있고 우측 뒤편에 사당이 있다. 전면 사랑채는 누마루로 꾸민 2칸 대청과 2칸 온돌방으로 이루어져 있고 누마루의 정면은 개방되어 있다. 양동마을 관가정에 가면 부엌을 찾아보는 것도 하나의 볼거리가 될 것 같다.

/영남이공대 교수

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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