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이 종전을 향해 막바지로 치닫던 1598년 11월19일, 7년여 전쟁 기간 동안 만 5년을 영의정으로 봉직하면서 전쟁을 진두지휘하였던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1542~1607)이 파직되었다. 공교롭게도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한 해 전 정읍현감으로 있다가 서애에 의해 전라좌수사로 발탁되어 전쟁 기간 내내 조국의 바다를 지켜냈던 이순신이 노량해전에서 일본군 전함 300여척을 격파하고 전쟁에 종지부를 찍으며 전사한 바로 그날이었다.

서애의 파직은 정치적 반대파의 탄핵이 빌미였다. 종전이 눈앞으로 다가오자 반대파들은 서애가 국정을 책임지는 영의정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일본과의 화친을 주장하여 나라를 잘못 이끌었다고 비판하였다. 서애의 공을 거론하며 이들의 의견을 묵살하였던 선조도 거듭된 탄핵에 마침내 굴복하여 파직을 단행하고, 이어 12월6일에는 모든 관작까지 삭탈하는 추가 조치를 취하였다. 삭탈관작의 수모를 당한 서애는 지친 몸을 이끌고 이듬해 2월 고향 하회마을로 낙향하였다. 이후 반대 여론이 가라앉자 선조는 1601년 서애의 관작을 복구시키고, 전쟁중의 공훈을 기려 1603년에 풍원부원군, 1604년에 호성공신에 연이어 임명하였다.

하지만 서애는 그때마다 직위를 사양하였고 공신상을 그리기 위해 선조가 보낸 화공도 돌려보냈다. 대신 서애가 고향 하회에 은거하면서 심혈을 기울인 일은 임진왜란에 대한 자신의 경험을 기록하는 것이었다. 이 기록에서 서애는 승전보다 패전의 경험을 더 담아내려 노력하였고, 특히 지휘자들의 잘잘못을 소상히 기술하는 데 공을 들였다. 기록의 목적이 승전의 헹가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전쟁의 참화를 되풀이 하지 않게 하는 데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서애는 저술의 이름도 `지난 일을 반성하고 경계시켜 뒷날의 우환을 예방하기 위한 기록`이라는 뜻에서 `징비록(懲毖錄)`이라고 명명하였다. 나라와 백성들에 대한 서애의 사랑이 물씬 묻어나는, 임진왜란에 대한 가장 완벽한 기록인 국보 132호 `징비록`이 탄생하는 배경이다.

서애 류성룡은 1542년 의성 사촌마을에 있는 외가에서 황해도 관찰사를 역임한 류중영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유명한 겸암(謙庵) 류운룡(柳雲龍)이 형이다. 유년시절을 하회에서 주로 보낸 서애는 21세 되던 해 아버지의 권유로 도산으로 퇴계 이황을 찾아가 문하에 들었다. 당시 서애를 가르쳤던 퇴계는 그의 사람됨을 보고 “하늘이 내린 인물”이라고 평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이후 1566년 25세에 과거에 급제하고 벼슬길에 올랐는데, 1570년에는 율곡 이이 등과 함께 사가독서(賜暇讀書)의 영예를 누리기도 하였다. 사가독서는 조선시대에 관료에게 특별 휴가를 주어 독서에 전념하게 하던 제도로서, 뛰어난 관료에게만 내리는 특전이었다. 이후 홍문관수찬, 이조정랑, 도승지, 경상감사, 대사헌 등을 거쳐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두 해 전인 1590년에 우의정에 올랐고 그 이듬해에 좌의정에 제수되었다. 좌의정으로 있으면서 형조정랑으로 있던 권율을 의주목사로 천거하고 정읍현감 이순신을 전라좌수사로 발탁하였다. 그리고 그 이듬해인 1592년 4월 운명의 전쟁인 임진왜란을 맞는다.

1592년 4월14일 부산포 공격을 시발로 조선에 발을 디딘 왜군이 파죽지세로 북상하자 선조는 4월30일 피난길에 올랐다. 그리고 3일만인 5월2일 개성에 도착한 후 전쟁에 대비하지 못한 책임을 물어 영의정인 이산해를 파직하고 서애를 후임으로 임명하였다. 하지만 서애 역시 좌의정이라는 중책을 맡고 있었으므로 책임을 져야한다는 조정의 여론에 밀려 임명 당일 저녁 곧바로 파직하였다. 하지만 서애는 이에 개의치 않고 풍전등화에 직면한 나라를 구하는 데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전세가 계속 불리하게 전개되자 선조의 중국 망명을 거론하는 조정에 대해 어가가 한 발짝이라도 이 땅을 벗어나게 되면 조선은 더 이상 우리의 나라가 아니라며 반대한 것도 그이고, 냉철한 정세 판단을 토대로 임금의 피난지를 함경도가 아닌 평안도로 결정하여 결과적으로 선조를 무사하게 한 것도 그였으며,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며 구원병 파견을 성사시킨 것도 그였다.

이와 같은 활약에 힘입어 1592년 12월에 평안도 도체찰사(都體察使)에 임명되었다. 비상시국에 중앙에서 지방에 파견하는 최고 군령권자가 된 것이다. 이어 충청, 전라, 경상 삼도 도체찰사를 역임한 서애는 1593년 10월 영의정에 다시 임명됨으로써 전쟁을 총괄하는 최고 책임자의 자리에 올랐다. 이후 1598년 11월19일 반대파의 탄핵으로 물러날 때까지 서애는 영의정으로 있으면서 전쟁을 선두에서 이끌었다. 이런 점에서 임진왜란은 곧 류성룡의 전쟁이었다고 해도 무방하다. 서애는 이 과정을 통해 나라와 백성을 구함으로써 자신을 두고 `하늘이 내린 인물`이라고 평했던 스승 퇴계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하늘이 내린 재상`으로서의 역할을 유감없이 수행해냈던 것이다.

서애는 효성도 뛰어나 관직생활 틈틈이 노모를 봉양하는 일도 게을리 하지 않았고, 겸암과 형제간 우대도 남달랐다. 서애가 평생 추구한 가치는 이처럼 가족과 나라에 대한 사랑이었다. 이는 그가 죽음 얼마 앞두고 자손들에게 남겼다는 시에서도 잘 드러난다.

숲 속엔 새 소리 그치지 않고

문 밖엔 쿵쿵 나무 찍는 소리

죽고 사는 일 또한 자연의 이치이나

평생 부끄러운 일 많아 한스럽네

권하노니, 자손들아 반드시 삼갈지니

충효 외에 힘 쏟을 일 따로 없음을

세계문화유산인 안동 하회마을의 서애종택에 들어서면 사랑채 대청마루 위에 `충효당(忠孝堂)`이라는 당호가 예스러운 서체로 방문객을 맞으며 서애 선생의 그런 가르침을 오늘에 되새기게 한다. 젊어 벼슬에서 잠시 물러나 있을 때 학문을 닦던 원지정사와 징비록을 집필한 장소인 옥연정사 그리고 위패가 모셔져 있는 인근의 병산서원도 선생의 자취를 느낄 수 있는 현장들이다.

/박원재(한국국학진흥원 수석연구위원)

저작권자 © 경북매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