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인·남몽오·박선장·권호신 학문·덕행 추모 사원

▲구만서원

봉화군 봉화읍 화천리 438에 있는 조선시대의 서원. 1985년 8월5일 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154호로 지정됐다. 1676년(숙종 2)에 지방 유림이 의견을 모아 건립했다. 금인(1510~1593), 남몽오(南夢鰲), 박선장(朴善長:1555~?), 권호신(權虎臣:1558~1629) 등 4현(賢)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한 서원이다.

건립 당시에는 묘호(廟號)를 기영사(耆英祠)라 했는데 1766년(영조 42) 구만서원으로 승격했다.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毁撤)되었다가 1967년에 지방 유림에 의해 복원됐다. 매년 3월과 9월의 두번째 정일(丁日)에 향사(享祀)를 지낸다.

경내에는 사당인 상현사(象賢祠), 강당인 흥교당(興敎堂), 출입문인 신문(神門), 관리인의 거주지로 쓰이는 주소(住所) 등이 있다. 4현의 위패가 봉안된 상현사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기와로 된 맞배지붕 건물이다. 흥교당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기와로 된 팔작지붕 건물인데, 가운데의 마루를 중심으로 양쪽에 방이 1칸씩 있다. 서원 내의 여러 행사 때 유림의 회합 장소로 사용됐다.

송계 금인·삼송당 남몽오·수서 박선장·도은 권호신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위패를 모시고 있는 서원이다.

자연암벽을 파서 만든 신라시대 불상 `국보 제201호`

▲북지리 마애여래좌상

봉화군 물야면 북지리 65711에 있는 국보 제201호.

봉화군 북지리에는 신라시대의 `한절`이라는 대사찰이 있었고, 부근에 27개의 사찰이 있어 500여 명의 승려들이 수도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북지리 마야여래좌상은 자연암벽을 파서 불상이 들어앉을 거대한 방모양의 공간을 만들고, 그 안에 높이 4.3m의 마애불을 매우 도드라지게 새긴 것이다.

넓고 큼직한 얼굴은 양감이 풍부하며 전면에 미소를 머금고 있어서 박진감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어깨는 다소 움츠린 듯하지만 체구는 당당한 편이며, 양 어깨에 걸쳐 입은 옷은 가슴에서 U자형의 굵직한 주름을 이루면서 양 팔을 거쳐 길게 늘어져 불상이 앉아 있는 대좌까지 덮고 있다. 손모양은 오른손을 가슴에 들고 왼손은 무릎에 내리고 있는 모습으로 큼직하게 표현되어 불상의 장중한 멋을 더해주고 있다.

불상 뒤편의 광배는 머리광배와 몸광배로 구분했으며, 곳곳에 작은 부처를 표현했고, 머리광배의 중심에는 정교한 연꽃무늬를 새기고 있다.

불상을 만든 시기는 얼굴이나 신체에 표현된 부드러운 모습 등을 고려할 때 7세기 후반으로 추정되며, 영주가흥리마애삼존불상(보물 제221호)과 함께 이 시기 영주·봉화 일대 불상 양식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신라 불교조각사에 거대한 발자취를 남기고 있다.

문신 김건수의 집… 조선시대 주택연구 중요 자료

▲해저 만회고택

봉화군 봉화읍 해저리 485에 있는 중요민속자료 제169호.

해저리마을의 오른쪽 깊숙한 곳에 우거진 뒷동산을 배경으로 남향하여 있는 집으로 조선 후기의 문신 김건수가 살던 집이다. 김건수는 순조 30년(1830)에 과거에 급제한 이후 현감, 부사를 거쳐 우부승지를 지냈다. 사랑채인 명월루는 그가 지었으며 철종 1년(1850)에 수리한 바 있다. 안채는 김건수의 6대조가 이 마을에 처음 들어와서 이곳에 살던 여씨에게 삿다고 전한다. ㄷ자형의 안채와 T자형의 사랑채가 있고, 중문채가 있었으나 현재는 없다. 안채는 남향한 중앙에 대청이 있고, 대청 양쪽에 안방과 상방이 대칭적으로 배치되어 있다. 원래는 一자형 중문간채가 있었으나 없어져 현재는 남쪽이 트인 상태이다. 사랑채는 안채의 동쪽 날개 끝에서 동쪽으로 치우친 위치에 있다.

안채는 조선 중기 건축으로 추측되며, 안방과 사랑방 뒷쪽에 수납공간을 두고 있는 옛 경북지방의 ㅁ자 집 평면배치법과 통하는 것으로 조선시대 주택연구에 좋은 자료가 된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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