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소리와 쇠북소리의 차이

19세기말 충북 지역에 최초로 세워진 충북 음성의 교회당.
<성탄제> ……………………………………………………………………………………… 오장환

산 밑까지 내려온 어두운 숲에

몰이꾼의 날카로운 소리는 들려오고,

쫓기는 사슴이

눈 위에 흘린 따듯한 핏방울. (…)

어미의 상처를 입에 대고 핥으며

어린 사슴이 생각하는 것

그는

어두운 골짝에 밤에도 잠들 줄 모르며 솟는 샘과

깊은 골을 넘어 눈 속에 하얀 꽃 피는 약초.

아슬한 참으로 아슬한 곳에서 쇠북소리 울린다.

죽은 이로 하여금

죽는 이를 묻게 하라.

일제의 억압이 더욱 심해진 시기에 발표된 오장환의 `성탄제`는 사냥꾼의 총에 맞은 엄마 사슴과 곁에서 이를 안타깝게 지켜보는 어린 사슴을 통해 인간의 비정함을 고발한 작품이다.

이 작품의 배경은 어두운 숲이 산 밑까지 울창하게 이어진 어느 조그만 산동네이다. 포수는 사냥개를 데리고 산속에서 며칠씩 잠을 자며 사냥을 한다. 몰이꾼은 보통 그 마을 사람들이 맡는다. 마을 사람들은 사냥감 몰이를 해주고 하루 일당을 받거나 일당 대신 고기를 얻어가기도 한다.

이런 사냥 풍경은 일제시대에 어디에나 볼 수 있었던 흔한 풍경이다. 오장환의 고향이 충청북도 보은군 회인면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이 작품은 자신의 고향에서 겪은 이야기를 소재로 삼은 것으로 보인다.

때는 겨울. 포수의 총에 맞은 엄마 사슴이 흘린 핏방울이 흰 눈 위에 떨어진다. 포수와 사냥개는 그 핏자국을 보고 조만간 사슴을 찾아낼 것이다. 어린 사슴은 그 곁에서 엄마의 상처를 치유할 샘물과 약초를 생각한다.

이때, 아슬한 곳, 즉 아슴푸레한 곳에서 쇠북소리가 들려온다. 쇠북은 쇠로 만든 북이라는 의미로 종을 가리키는 말이다. 어떤 이는 이 쇠북소리가 절의 종소리라고 보기도 하고, 또 어떤 이는 몰이꾼들이 두드리는 꽹과리소리라고 하기도 한다. 이것을 무엇으로 보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시가 된다.

이 쇠북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을 가리키는 것일까. 흔히 쇠북은 불교 사찰의 범종을 가리킨다. 수많은 시와 노래에서 이런 식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보면 그 다음 구절이 제대로 이해되지 않는다.

“죽은 이로 하여금/ 죽는 이를 묻게 하라.” 이 구절은 시의 전체적인 흐름으로 볼 때 난데없이 등장하는 말로 보인다. 사냥풍경과 전혀 무관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죽음과 연결되긴 하지만, 죽은 이로 하여금 죽는 이를 묻는다는 말은 모호하기만 하다.

그러나 이 구절이 성경, 더 구체적으로는 마태복음(8장 22절)에 나오는 말이라는 것을 알면 이해가 달라진다. 소설이나 철학서 등에서 가끔 등장하는 유명한 이 구절은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고 따르겠다는 제자를 향하여 예수가 하신 말씀이다. 성경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제자 중에 또 하나가 가로되 주여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 하시니라” 이 말은 세속적인 일은 세속에 맡겨두라는 말이다. 예수를 따르는 일이 무엇보다 성스럽고 막중하기 때문에 이것을 세속의 일과 경중을 비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을 생각할 때, 이 구절이 왜 이 시에 등장하는지 이해할 수 있다. 어린 사슴이 죽어가는 어미 사슴을 두고 떠나야 하는 상황을 설명하는 데 이 구절보다 더 적절한 것은 없었던 것이다. 죽어가는 어미는 어린 사슴이 어찌할 수 없는 세계에 속해 있으므로 어린 사슴은 이제 자신의 길을 가야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시에 나오는 쇠북소리는 절이 아니라 교회당의 종소리임을 이해하게 된다. 그래서 제목이 성탄제, 즉 크리스마스인 것도 자연스럽다. 이 때문에 성탄절에 벌어지는 인간의 살육이 더욱 비정하게 보이는 것이다.

교회당의 종을 쇠북으로 표현하는 감각은 근대의 풍경을 우리의 정서와 친밀하게 연계시키려는 의도와 연계되어 있다.

이와 달리 도시적 감각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김광균은 교회당의 종소리를 낯설고 도시적인 것인 채로 보여준다. “분수처럼 흩어지는 푸른 종소리”(`외인촌`)라는 표현에 나오는 종소리는 분수와 마찬가지로 도시적이고 이국적인 느낌을 준다. 이런 종소리는 낯선 공감각적 표현처럼 우리가 전혀 들어보지 못한 새로운 것으로 다가온다.

똑같은 교회당에서 들리는 소리지만 종소리와 쇠북소리는 이처럼 전혀 다른 차원에 속하는 소리이다. 오장환과 김광균은 각자 자신의 시적 흐름에 어울리도록 같은 소리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사용한 것이다. 단순한 표현의 차이가 기법의 문제가 아니라 문학관의 차원에 속하는 것임을 이런 예에서 확인할 수 있다.

(경북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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