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 세 번 오가며 남북 방송교류 추진 큰 보람”

경북 왜관 출신의 손준철(53·사진) 국회 정보위 수석전문위원(차관보급)은 실향민의 아들로 태어나 왜관초등학교, 경일중학교, 대구고등학교를 거쳐 단국대행정학과를 졸업했으며, 동 대학에서 행정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81년 입법고시에 합격, 국회 입법조사관을 거쳐 재정경제위와 예산결산위 입법심의관, 국회사무처 연수국장, 문화관광위·정무위 전문위원을 거쳐 현재는 국회 정보위원회 수석전문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고교때 기계체조 선수를 지낸 손 위원은 국회 축구회장을 10년간 맡아 `국회 축구회의 대부`로 불릴 만큼 운동을 좋아하는 한편, 일본 와세다 대학서 공부할 때 일본기원으로부터 아마3단 자격증을 받은 애기가이기도 하다.

손 위원을 만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비롯, 입법공무원으로서 보람과 애환 등을 들어봤다.

-어린 시절의 고향얘기부터 해보자.

▲저의 부친은 함경남도 홍원이 고향으로,실향민입니다.이북에서 학교교사를 했는 데, 지주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형제들이 다 죽고 혼자 겨우 살아남아서 도망을 나왔다고 해요. 남한에 내려와 거제도에서 청과상을 했는 데, 어느날 서울 용산의 친구를 만나러 기차를 탔다가 왜관근처에서 고장이 나서 하염없이 기다려야 했답니다. 그때 배가 고파서 찾아들어 간 집이 선산의 외갓집이라고 해요. 드라마같은 얘기죠.

-어린 시절 기억나는 일이 있다면.

▲저는 칠곡군 왜관읍에서 태어나 왜관초등학교를 졸업했어요. 중학교 진학때 마지막 시험기수여서 시험을 쳤는 데, 수석으로 합격했던 일이 기억납니다. 1969년쯤의 일인데, 당시에는 중학교 입학시험 수석합격자 사진이 신문에 실릴 때 여서 모 일간지에 내 사진이 실렸던 것으로 압니다.

-어릴 때 꿈은 무엇인지.

▲실향민인 부친을 보고 자랐기에 남북통일을 이루는 데 기여하고 싶다는 꿈을 갖고 있었어요. 특히 설이나 추석 명절같은 날 부친이 외로워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학교 다닐 때 에피소드가 있다면.

▲고교때 기계체조 선수를 했어요. 그때 같이 운동했던 친구가 미국에 건너가 보험계리사 자격증을 따서 돌아와 지금은 삼성그룹 금융부문을 총괄하고 있어요. 그 친구와 만나면 서로 "너 어떻게 삼성 들어갔냐""너 어떻게 고시했냐"하고 놀리곤 해요.

-대학생활은 어떻게 보냈나.

▲처음 들어갔던 대학에서는 억울하게 학생운동을 한다는 이유로 쫓겨났어요. 그래서 혼자 도를 닦겠다며 절에 들어갔는 데, 거기서 불경보다는 장자에 관한 책을 많이 읽었어요. 그러다 `도를 닦는 게 인간세상에서 멀지않다`는 구절을 읽고 하산해 단국대학교에 다시 특차생으로 입학했죠. 4년동안`단원장학생`이란 이름으로 전액장학금을 받고 다녔는 데, 3학년때 행정고시 1차시험에 합격했고, 4학년때 2차시험을 남겨놓았는 데, 그해 입법고시에 합격해서 입법공무원으로 일하게 됐어요. 단국대학교에는 당시 고시반이 따로 있었고,생활비까지 지원해 어떤 해에는 서울대 다음으로 많은 수가 사법고시에 합격하기도 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당시 장충식 총장님은 서울대를 졸업한 사람들을 단국대학원으로 입학시키는 열성으로 학교의 이름을 높였어요. 그래선지 대학 동기 중에서도 입법고시에 2명, 사법고시에 6명이 합격했어요.

-단국대와는 인연이 깊은 것 같다.

▲단국대에서 행정학 박사학위도 받았고, 지금은 단국대 행정법무대학원 겸임교수로 강의도 하고 있습니다. 학교에 일이 있으면 현 장호성 총장이 내게 의논하곤 할 정도로 인연이 많습니다. 일각에서는 단국대를 나온 것이 핸디캡이 되는 것아니냐고 하는 데, 저는 학교 때문에 손해본 게 아니라 나 때문에 학교가 좋은 평가를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더욱 열심히 일하고 있습니다.

-추후 정치를 해 볼 생각은 없나.

▲국회에 있는 사람들은 선출직은 희망하지 않는 경우가 많아요. 선출직의 고달픔을 너무 잘 알기 때문에 그런 것 같아요. 저도 마찬가지예요. 퇴직하면 뭔가 만들어서 오래도록 일할 수 있는 생산적인 일을 하고 싶어요.

-국회에서 맡은 업무 가운데 기억나는 일이 있다면.

▲초임때는 입법조사부에서 조사업무를 했고, 1986년도 보건사회위에 있으며 6.29민주화선언이 있은 후 노동법 개정할 때 개정작업에 참여했던 일, 특히 1987년도 이뤄진 9차 개정헌법 특위에 파견돼 헌법개정작업에 참여했던 일이 기억에 많이 남습니다.

-그 가운데 보람을 느꼈던 일은.

▲헌법 개정작업에 참여해 전국의 읍·면·동 에 붙은 헌법개정 벽보초안을 만들어서 배포했던 것을 보면서 큰 보람을 느꼈습니다. 그 일로 서기관 승진도 빨리 할 수 있었고, 일본 유학도 가게 됐죠. 일본 유학은 일본헌법학회 등에서 한국헌법의 배경 등을 인터뷰했는 데, 그 일이 계기가 돼 와세다 대학 정치학부에서 2년간 공부를 했습니다. 와세다 대학은 총리를 많이 배출한 학교로, 우리나라에선 박태준 총리도 그 학교를 나온 것으로 압니다.

특히 보람있었던 일은 방송위원회 내에 있는 남북방송교류추진위원회 위원으로서 평양을 세 번 방문, 남북간 방송교류를 추진했던 일입니다. 남북 방송교류 취지는 독일통일에서 보듯 방송의 교류가 통일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때는 젊은 시절의 꿈이 이뤄지는 듯 했죠. 3년 가까이 일하면서 남북 방송물 전시회도 이뤘고, 송해·이미자, 조용필 평양공연을 이루는 데도 일조를 했습니다.

-국회방송 시설도 만들었다고 하던데.

▲공보담당관을 하면서 국회 방송시설을 기획하고, 시설을 만들게 되면서 초대 방송과장으로 운영도 맡아 일했죠. 그 때 국회내 CCTV설치를 완료했는 데, 국회가 선진화되기 위해서는 공개될 필요가 있다는 생각에서 시작된 일입니다. 그 결과 지금은 국회의사중계가 되고 있고, 케이블방송으로 국민들이 볼 수 있게 된 제가 이룬 업적이라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지금의 방송규칙도 모두 제가 그 당시 만든것이니까요. 아뭏든 행정직이 방송장비에 대해 공부해가며 하느라 힘도 들었지만, 보람있는 일이었어요.

-연수국장 시절에 추진한 일이 있다면.

▲그 때 처음으로 지방의회 연수를 시작해 호응을 얻었던게 생각납니다. 지방의회 의원들이 회의진행이라든가 예산이나 법률 심사를 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건 데, 지금도 신청을 받아서 진행하고 있습니다.

-캐나다 유학은 어떻게 갔나.

▲국장 보직을 마치고, `공무원 직무훈련프로그램`으로 2005년 유학을 떠났어요. 가족들과 함께 UBC대학을 다니며 1년간 시간을 보냈는 데, 10박11일에 걸쳐 LA로 가는 버스투어도 하는 등 바쁜 공직자생활가운데서 가족과 시간을 보낼 수 있었던 기간이어서 참 즐겁게 지냈습니다.

-여러 상임위 전문위원을 지내면서 겪은 뒷얘기를 소개한다면.

▲정무위 전문위원으로 근무할 때 일인 데, `특수임무수행자 지원`법안을 만들었는 데, 사회안정을 위해서도 필요한 법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나중에 그 분들이 복도에서 무릎꿇고 고맙다는 인사를 해 마음이 짠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또 한가지는 2008년도 금융위기가 터졌을 때 금융관계법인 은행법이나 산업민영화법, 금융산업 구조조정법 등이 모두 통과됐습니다. 야당도 여기에 협조를 해 금융위기 극복에 국회가 큰 역할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제가 IMF때 재경위에 있으면서 겪었던 쓰라린 경험을 사례로 들면서 야당을 설득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IMF때도 국회가 구조조정기금법 등 금융개혁법을 제때 만들었으면 막을 수 있었는 데, 법을 제때 만들어주지 못해 그렇게 피해가 컸다는 논리가 야당의원들을 움직인거죠. 그래서 여야가 대치하면서도 금융관계법은 모두 통과가 됐던 겁니다.

-현재 맡고 있는 정보위에 대해 소개한다면.

▲소관기관이 국정원, 기무사, 정보사, 경찰청 정보국 등인데, 여기에 관련된 정보예산을 심의·의결하고, 관련 법률들을 입안하는 일입니다. 정보위에는 현재 대테러방지법, 사이버보안법 등의 법령이 계류돼 있는 데, 국정원 권한 강화를 반대하는 분위기 때문에 심의가 안되고 있어 걱정입니다. 사이버보안법의 경우 국정원이 훈령에 의해서 하고 있는 상황이어서 국정원 활동에 법적 근거를 마련해줘야 하기 때문에 처리가 시급하죠. 최근 디도스 공격도 국정원에서 총괄해 방어한 것으로 알고있습니다.

-고향 분들에게 인사말을 한다면.

▲나 혼자 성공하려고 하면 잘 안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남을 도와줘서 잘되게 하는 것이 곧 내가 잘되는 길이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주변사람들에 대해 애정을 갖고 도와주고, 힘을 길러주는 게 본인의 힘을 기르는 길이라고 믿고 서로 도우며 지냈으면 합니다.

/김진호기자 kjh@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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