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덕군 남정면 장사리 해변, `장사상륙전전몰용사위령탑`이

모래밭 너머 푸르디 푸른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우국청년(의사)들이여, 그대들의 명복을 온 국민이 빌고 있으니 고이 잠드소서`

위령탑 건립 1주년을 맞아 비석에 새겨진 글귀.

이 아름답고 평안한 휴양지에서 목숨을 앞세우고 적진을 향해 뛰던

학도병들의 젖은 눈망울을 짐작하노라니 만감이 교차한다.

1950년 6월25일 전쟁이 발발한 뒤 낙동강을 최후 방어선으로 아군은 치열한 공방전을 계속하고 있었다. 유엔군 총사령관 맥아더 장군은 총 반격전을 위한 인천상륙작전을 결심했고 동해안 장사동 적후방 적전상륙의 양동작전을 명령 하달했다. 장사상륙작전은 인천상륙작전(1950년 9월 15일) 하루 전 북한군의 눈을 동해로 돌리기 위해 펼친 위장 작전이었던 것이다. 그해 8월 24일 대구와 경남 밀양에서 자원 입대한 대원들은 일주일간 밀양에 주둔하며 기초교육을 받았고 다시 부산 육군본부 청사로 옮겨 기본 유격교육을 받았다.

1950년 9월13일 오전 부산부두, 육군본부 직할 독립 제1유격대대(대대장 이명흠)는 정일권 육군참모총장과 신성모 국방부장관이 참석한 가운데 작전명령 제174호 출동명령을 받았다. 그리고 대원 772명과 지원요원 56명을 태운 LST 문산호(2700톤급)는 부산항을 출항했다. 대원 중 90%가 학생 신분으로 짧은 기간의 군사교육을 마치자마자 군번과 계급장 대신 임시 계급장을 달고 출전한 것이다.

9월14일 새벽 5시 경, 문산호는 예정대로 장사 해안 상륙지점에 닿았다. 그러나 3~4m에 이르는 파고를 몰고 온 태풍 캐지아호는 원래 정박 지점에서 남쪽으로 문산호를 밀어내고 말았다. 오도 가도 못하고 수중 모래 턱에 좌초된 문산호는 훤히 드러난 해변에서 적의 공격을 고스란히 받을 수밖에 없었다. 적이 쏘아대는 총알이 물거품을 일으켰다. 총에 맞은 대원들이 물위로 떠올랐다. 멀리 모래밭에도 대원들이 쓰러져 있다. 두려움을 떨치려고 눈을 꾹 감고 바다로 뛰어내렸다. 그리고 솔밭을 향해 달렸다. 전투기들은 고도를 낮추어 적진을 향해 폭격을 하고 바다에서는 함포 사격으로 적의 공격을 누그러뜨렸다. 이들은 어렵게 문산호와 장사 해안 소나무에 밧줄을 연결하였고 상륙작전은 성공했다. 상륙한 대원들은 장사리 부근의 적을 섬멸하고 화진리, 구계리 뒤 봉황산까지 진출, 적의 보급로를 차단하는 등 치열한 전투를 치렀다.

일주일 후, 유격대원들을 태우러 새로운 상륙함이 도착했다.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목숨을 부지한 대원들은 육군본부가 있는 부산으로 귀환하였다. 부산항은 돌아오지 못한 이들을 위한 눈물과 살아 돌아온 이들을 향한 뜨거운 환영으로 눈물범벅이었다. 맥아더 장군이 이들의 값진 희생을 애도하며 친필 비문을 남길 만큼 장사상륙작전은 한국전쟁 중 중요한 전투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상륙전에서 아군은 학도병 등 전사 139명 부상 92명을 포함하여 수십 명의 행불자를 발생시켰다. 오랜 세월이 지난 1980년 7월14일, 당시 참전했던 대원들이 `유격동지회`를 결성하였다. 그리고 1991년 각계의 도움을 받아 위령탑을 세우고 해마다 9월14일이면 이곳을 찾아 꿈에도 잊을 수없는 동료들을 그리며 위령제를 지내고 있다.

“그날, 파도가 엄청나게 쳤어. 배가 들어오지도 못하고 나가지도 못하고 솔밭 앞 바다에 서 있었지. 남산에서 내려다보던 인민군들이 거기다 대고 직사포를 쏴댔어. 배가 육지를 보고 바로 섰으면 그래도 나았을 텐데 옆으로 서 있었단 말이야. 참 많은 군인들이 죽었어. 군복을 입고 총을 들었어도 순전히 어린 학생들이었지. 그래도 용을 쓰고 남산으로 올라갔는데 점령이 어디 쉽나. 다시 후퇴 하고 또 올라가고 그랬지. 그때 부경 앞 바다에 군함이 하나 있었는데 후퇴하던 군인들이 목선을 타고 군함 쪽으로 가다가 파도 때문에 그만 침몰했어. 지금은 고인이 된 마을 어르신 한 분이 부인네들 보고 “내가 줄로 매서 끌어안고 나올 테니 줄을 당기라”고 했대. 그런데 끌어내고 보니 다 살았는데 한 사람이 죽었더라는 거야. 그가 문산호 최고 대장이라는 말도 있더군. 묘를 쓸 여유가 있나. 업고 가서 군인들이 들어가 총 쏘려고 파 놓은 구덩이에 일단 묻었지. 전쟁이 끝나고 가족들이 그 양반을 찾아왔고 묻은 장소를 발굴해 그 옆에다 정식으로 묘를 썼어. 그러다가 훗날 자손들이 국립묘지로 옮겨 갔지. 그 후로도 수시로 유해 발굴작업을 했는데 참 많이 찾았어.”

“전쟁이 끝나고도 한참동안 장사 바닷가에 배가 그대로 있었어. 학교 끝나면 친구들과 모래사장에 나가 놀곤 했는데 가끔 배 안을 들여다보곤 했지. 기관실이고 뭐고 속이 시커멓게 타버린 곳에 시체도 서넛 있었는데 인민군이란 말이 많았어. 왜냐하면 민간인이나 아군 같았으면 찾아 갔을 건데 방치돼 있었거든. 인민군들이 못 달아나고 거기 들어갔다가 아군이 설치한 지뢰에 죽은 거라고들 했지. 정확한 연도는 모르겠지만 문산호는 육군인지 해군인지에 불하를 받았다는 사람들이 해체를 해서 고물로 썼어. 그게 있었으면 좋았을 걸. 전쟁이 언제 일어났는지도 모르는 요즘 애들한테는 그 대포 맞은 흉터만 봐도 교육이 되었을 텐데 말이야.”

마을 어르신들께서 들려주신 생생한 말씀이 귓가에 맴돈다. 김경환, 김성진, 서성용, 박원함, 이범주, 유지춘, 김치욱, 배병석, 박명하, 안윤효…. 차가운 비석에 빼곡하게 적힌 772명 학도병의 이름을 조용히 눈으로 불러본다. 소나무 아래 막걸리 한 병이 놓여 있다. 그 곁 종이컵엔 누구도 마시지 못할 막걸리가 말갛게 담겨 있다. 누가 누구에게 보내는 마음일까.

/권선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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