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이 일어난 그 이듬해 2월, 경상북도 상주에서 정경세(호는 愚伏, 1563~1633)와 상주의 유학자들로 이뤄진 의병진이 왜적의 공격으로 함락당했다. 이 때 의병진에 참여했던 상주의 유학자 이전(호는 月澗, 1558~1648)과 이준(호는 蒼石, 1560~1635) 형제는 왜병들을 피해 백화산 정상으로 피하려 하였다. 그런데 갑자기 동생 이준이 토사곽란을 일으켜 쓰러져 탈출할 수 없는 지경에 처했다. 그러자 이준은 형의 손을 부여잡고 “저는 병으로 죽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 형님께서는 빨리 여기를 탈출하셔서 선조의 제사를 이으십시오”라고 했다. 그러나 형인 이전은 완곡하게 거부하며 “옛날에 형제가 도적들과 맞붙어서 죽기로 싸운 사람도 있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너를 버리고 홀로 살아 남을 수 있겠는냐?”라고 말한 뒤 동생 이준을 등에 업고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이 때 칼을 뽑아 들고 오는 두 명의 왜적과 마주하게 되었는데, 이전은 “하늘은 우리가 잘못함이 없는 것을 아실 것이다”라고 부르짖고는 산을 우르러 “원컨대 산령들께서는 우리들을 살려 주소서”라고 축원하였다. 그런 이후 활에 화살을 매겨 왜적들에게 쏘면서 왜적들을 입으로 꾸짖자 그 소리와 기상이 엄숙하여서 왜적들이 놀라 접근하지 못하고 달아났다.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찰나에 목숨을 버려가면서 동생을 구하려 했던 형의 이야기는 400여 년이 훨씬 더 지난 지금에도 감동이 줄지 않는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교훈을 위해 창작되거나 각색된 것이 아니라, 형 이전의 문집 기록을 그대로 옮겨온 것이다. 특히 이 기록은 이전의 문집인`월간집`이 발간될 그 당시 영남의 대표적 유학자였던 이상정(호는 大山, 1711~1781)이 직접 쓴 것으로, 그 역시 이 이야기가 그림으로 그려져 있는 `형제급난도`를 보고 감명을 받아 기록한 것이다.

임진왜란 전후 시기, 상주를 대표하는 유학자 이전과 이준 형제는 특히 형제간 우애가 두텁기로 유명했다. 임진왜란 이전에도 동생 이준이 심각한 전염병에 걸린 적이 있었는데, 부친이 이전에게 몸을 피해 병이 전염되지 않도록 권하자, “형제는 수족과 같아서 서로 지켜주는 의리가 있어야 하는데, 어찌 동생을 버리고 혼자 피신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하면서 곁을 지켰다고 한다. 이와 같은 형제의 우애는 평생 이어져 이후 그들 자제들 대에까지 친형제 이상으로 우애를 지켰다고 한다.

이러한 형제의 이야기가 그림으로 그려진 것은 중국에서였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이준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중국 관리들에게 이 이야기를 했을 때 그들 모두가 감동을 받아 화공으로 하여금 그림을 그리게 했던 것이다. 백화산을 배경으로 형이 아우를 설득해서 떠나는 장면, 형이 아우를 내려놓고 왜적을 향해 화살을 겨누는 장면, 적을 퇴치하고 산 정상을 향해 아우를 업고 달리는 모습, 그리고 백화산 정상 밑에서 아우를 내려놓고 위로 하는 모습 등이 사실적으로 표현되었다. 이후 조선에 돌아온 이준은 이 사실을 소재로 당시 유명한 사람들에게 시문(詩文)을 청해서 덧붙였는데, 정경세·장유 같은 인물들을 포함해 그 대를 대표하는 인물 27명이 방명을 남겼다. `형제급난도`가 만들어 진 과정이다. 유학자로서 목숨을 다해 형제애를 실현했고, 이러한 행위에 대해 당시 모든 선비들이 기록으로 존숭해 주는 문화의 산물인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형제애가 더욱 특별한 의미를 갖는 것은 그들이 `혈연적 사랑`에만 한정되지 않고, 그것을 이웃과 나라에 대한 사랑으로 확장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유학은 가족간의 사랑을 바탕으로 그 사랑을 이웃과 동포, 그리고 만물까지 확장할 것을 강조하는데, 두 형제는 바로 이러한 유학의 기본 정신을 실현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모습은 상주시 청리면 율리에 설치되어 있는 존애원(存愛院)에서 찾을 수 있다.

존애원은 이전·이준 형제와 `성이 다른 형제(異姓兄弟)`라고 지칭될 정도로 가까웠던 정경세가 주도하고 성람과 이전·이준 형제 등이 참여하면서 형성된 조선 최초의 사설병원이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 끝난 후 상주지역은 최악의 의료 상태에 처하였다. 상주는 왜병들의 통과 길목에 위치하면서 많은 전투가 있었고, 이로 인해 농토가 황폐화 되고 많은 젊은 사람들이 죽게 되면서, 경제적 기반이 와해되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당시 상황은 `이웃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여기는` 진정한 유학자들의 실천정신을 일깨웠고, 그것이 `존애원`의 설치로 드러났던 것이다. 이준이 쓴 `존재원기(存愛院記)`에는 이와 같은 마음이 잘 드러나 있다.

남과 내가 비록 멀고 가까움은 있겠지만, 함께 하늘과 땅 사이에 태어나 같은 기(氣)를 받았으니, 가슴 속에 가득 찬 `차마 어찌 할 수 없는 (어진)마음`을 확장시켜 동포를 살리는 것이 어찌 본분을 다하는 일이 아니겠는가?

`차마 어찌 할 수 없는 마음`, 즉 동포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여기면서 그 아픔을 참지 못하는 마음으로 동지들을 규합하고 재정을 모아 약재를 채취하고 병을 진찰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특히 이 일은 같은 마음을 가진 상주의 13개 문중 인물들로 결성된 낙사계에 의해 주도되면서, 근 200여 년간 지속될 수 있었다. 중국 주자학 형성을 이끌었던 정이가 “자기의 선한 본심을 보존하고, 이를 바탕으로 다른 사람과 모든 만물을 사랑한다”는 의미에서 말했던 `존심애물(存心愛物)`에서 `존(存)`자와 `애(愛)`자를 따서 당 이름을 붙인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존애당기`에 “애(愛)란 인(仁)함을 베풂으로써 어버이를 친애하는 마음으로 백성들을 사랑하고, 백성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만물을 사랑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던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선한 도덕본성을 기르고, 이를 바탕으로 가족을 넘어 이웃과 동포까지 사랑하려고 했던 그들의 정신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점점 핵가족화 되어 가는 요즘, 어쩌면 `가족에 대한 사랑`은 이들이 살았던 시대보다 짙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조금만 들여다보면, 그 사랑이 핵가족 안으로만 한정되면서 우리 가족과 후세대가 걱정 없이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데는 실패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사회가 만들어 낸 문화는 다시 가족 공동체를 무너뜨리는 결과를 낳고 있다. 이렇게 보면 이전·이준 형제는 아마도 형과 동생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웃과 사회를 사랑하는 것이 결국 나의 형·동생, 그리고 가족들이 살아 가기 좋은 사회를 만드는 길임을 알고 있었던 듯 하다. 형제애를 넘어 이웃과 사회에 대한 사랑으로의 확장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가족에 대한 사랑`인 것이다. `형제급난도`와 존애원은 이와 같은 가치로 살았던 사람들이 보여주는 중요한 삶의 흔적이 아닐까.

/이상호(한국국학진흥원 연구위원)

존애원과 인근의 가볼만한 곳

질병 시달리는 주민들 치료·지역화합 이끈 의료시설

◆존애원

상주시 청리면 율리 353에 있는 조선시대의 사설 의료기관. 경북기념물 제89호.

1993년 2월25일 경상북도기념물 제89호로 지정됐다. 1599년(선조 32) 임진왜란 뒤 질병에 시달리는 주민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정죽 성람, 정경세(鄭經世), 창석 이준(李埈), 김각(金覺) 등이 중심이 돼 13개 문중이 계를 모아 설치·운영한 사설 의료기관이다. 중국 송(宋)의 선비 정자의 `존심애물(存心愛物)`를 따서 이름을 지었다. `사랑하는 마음이 있으면 남을 돕게 된다`는 뜻의 `존심애물(存心愛物)`을 따서 지은 이름이다. 의료시설이 턱없이 부족했던 당시 십시일반으로 많은 약재와 시설을 모아 가난한 서민들을 치료해 주었다. 의서를 발간해 쉬운 질병은 백성들이 스스로 치유할 수 있도록 했다.

의료뿐만 아니라 상주 지역 13개 문중의 모임인 `낙사계`를 만들어 지역화합을 이루고 공히 함께 어려운 현실을 극복하고자 의견을 모았다.

즉 존애원은 상주 선비들의 박애정신에서 탄생한 사설 의료시설인 동시에 향토 사랑을 실천한 낙사계원들의 응집소였다. 지금도 상주 지역은 이러한 선비들의 노블레스 오블리주인 존애원의 가치가 살아남아 지역사회 발전에 공헌하고 있다.

낙동강 1300리 물길 중 풍광이 가장 뛰어난 명소

◆경천대

상주시 사벌면 삼덕리 산12-3에 있는 경천대<사진>는 상주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다.

낙동강 1300리 물길 중 풍광이 가장 뛰어난 곳으로 유명하다.전망대 위에 올라서면 넓게 펼쳐진 모래사장과 기암절벽을 굽이쳐 지나가는 낙동강이 훤히 내려다보인다. 하늘을 떠받들고 있다고 해서 이런 이름을 얻었으며 자천대라고도 불린다.

상주시 사벌면 삼덕리 낙동강변에 위치한 경천대는 깎아지른 기암절벽과 넓은 백사장,울창한 노송숲이 절묘하게 삼박자를 이루고 있다. 수년전 국민관광지로 개발된 경천대 안의 천수봉에 올라 이곳 물줄기를 굽어보면 과연 천하비경임을 느낄 수 있다.

조선 인조15년,당대의 석학 채득기선생이 은거하며 학문을 닦았다는 무우정이 옛모습 그대로 이곳에 남아있으며 임진왜란때 큰공을 세운 정기룡장군의 말먹이통과 명나라 장수가 세웠다는 비석도 볼 수 있다.

민박시설과 편의시설이 잘 갖춰져 있는데다 깎아지른 절벽과 노송이 어우러져 있다. 박물관과 전통혼례관까지 인접해 있어 종합 관광지로 손색이 없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저작권자 © 경북매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