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국사 측에서는 관람자들을 위해 극락전 측면 기단 좌우로 임시 나무계단까지 만들어 놓았고 극락전 앞마당 석등 앞에 석주까지 세워 그 위에 돼지를 한 마리 새로 만들어 앉혀 놓았다. 우리는 흔히 돼지를 경제적 부를 가져다주는 것으로 생각한다.
1593년 임진왜란이 일어난 이듬해 부산에 진을 치고 있던 왜군 10여명이 불국사에 참배하러 왔다가 불국사 스님들이 감춰 둔 무기를 발견하고 격분해 불국사 전역에 불을 지르고 만다. 하지만 신라 후손들의 불심(佛心)은 쉬 꺼지지 않았고 조선 영조 26년(1750)에 극락전은 다시 중창된다. 대화재 이후 상부의 목조건물은 모두 소실되었지만 하부의 석조물은 그대로 남아있었다. 신라 때 대목(大木)이 지은 바로 그 자리에 조선의 대목이 조선시대의 치목수법과 양식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계 팔작지붕 극락전을 다시 일으켜 세운 것이다. 극락전의 창호는 정면과 배면에 설치했다. 특히 정면 `어칸`(가운데 칸)은 덧기둥을 2개 세워 3분할하고 빗살청판분합문을 각각 2짝, 3짝, 2짝을 설치했다.
지금이야 크레인 같은 각종 건축 기계설비가 많아서 집 짓는 기간이 얼마 소요되지 않지만 400여 년 전 그 때는 그렇지 못했다. 대목이 절집을 짓기 위해 가족을 뒤로하고 집을 나서면 여생을 다 바칠 각오로 일을 시작했어야 했다. 그래서 당시의 절집에는 대목의 숨은 애환이 군데군데 남겨져 있다. 불국사 극락전 편액 뒤에 감춰진 황금돼지 또한 그 중 한가지일 것이다.
임진왜란 7년, 병자호란 2년을 치른 후 민초는 굶주림에 시달리고 나라살림이 어려웠을 때 법당을 다시 일으켜 세우던 조선의 대목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마도 민초의 굶주림과 나라의 경제적 부흥을 기원하였을 것이다. 그렇게 대목의 손에 의해 만들어 진 것이 바로 금돼지가 아닌가 생각한다.
그런데 사람들이 극락전 편액 뒤에 감춰진 금돼지는 찾으면서도 대웅전 전면 좌측 주간포에 쉽게 찾아 볼 수 있는 돼지를 보지 못함은 왜일까? 어떤 이는 극락전 돼지가 대웅전 돼지의 어미라고 하는데 대웅전(1660)이 극락전(1750) 보다 먼저 중창된 건물이니 뒤바뀐 얘기가 아닐까. 직접 보고 비교해보는 것도 볼거리가 될 것 같다.
영남이공대 교수
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