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넓은 영해평야 터전 고풍스런 유교문화 꽃피워

입춘이 지나자 흰 눈을 밟고 선 나무들이 종아리를 환히 걷었다. 볕은 숲 깊숙이 들어가 그들의 발목을 감싼다. 동해안 7번 국도변 야산 풍경을 따라 영덕군 영해면으로 들어섰다. 영해는 고대 우시군국(于尸郡國)의 근거지로 조선시대 후기까지 영해부가 설치되어 있던 곳으로 오랜 역사를 지닌 고장이며, 구한말 평민의병장 신돌석 장군의 활약과 3·18 만세운동 등 숱한 구국운동이 전개된 충절의 고장이다. 또한 고려조의 대 사상가(성리학)이자 훌륭한 재상으로써 불사이군의 충절과 고려 문학을 대표하는 목은(牧隱) 이색(李穡)선생(1328~1396년)을 배출한 곳이기도 하다.

목은 이색 배출한 역사·충절의 고장

영양 남씨 집성촌 `괴시리` 유산 寶庫

면소재지에서 대진 해수욕장으로 가는 1km 남짓 오른쪽에 괴시리 마을이 있다. 망월봉을 병풍처럼 두르고 영해평야를 앞마당처럼 펼치고 앉은 마을, 400여 년을 흘러온 30여 채 고택이 그윽한 눈매로 이방인을 맞는다. 실핏줄 같은 가지를 뻗고 선 고목은 두루적막이나 마을 입구에 선 `가정목은양선생유허비(稼亭牧隱兩先生遺虛碑)`는 역사 속 깊은 이야기를 술술 풀어내고 있다.

괴시리 마을의 고택은 조선시대 전통가옥들로 고색창연한 영양 남씨 집성촌이다. 동해로 흘러드는 송천(松川) 주위에 늪이 많고 마을 북쪽에 호지(濠池)가 있어 호지촌(濠池村)이라 부르다가, 목은 선생이 원(元)나라에서 이름을 떨치고 고국으로 오는 길에 들른 중국 구양박사방(歐陽博士坊)의 괴시마을과 자신이 태어난 호지촌의 풍경이 비슷해 귀국 후 괴시(槐市)라고 고쳐지었다고 전한다.

고려 말에 함창 김씨(咸昌 氏, 목은 선생의 외가, 선생의 외조모는 영양 남씨)가 처음 입주(入住)한 이래, 조선 명종(1545-1567)에는 수안 김씨(遂安氏), 영해 신씨(寧海申氏), 신안 주씨(新安 朱氏) 등이 거주하다가, 인조 8년(1630년)부터 영양 남씨(英陽南氏)가 정착하였다. 그 후 타성(他姓)은 점차 다른 곳으로 이주하였고 조선 중기 이후부터 영양 남씨만이 집성촌(集姓村)을 이루고 문벌(門閥)을 형성하며 살아가고 있다. 물론 군데군데 빈 집도 있으며 낡은 가옥을 현대의 재료들로 보수한 흔적 또한 쉬이 눈에 띈다. 그러나 사람을 모두 떠나보내고 보존이라는 이름 아래 우두커니 둘러앉은 여느 고택들에 비해 이곳은 문화와 예절이 전승(傳承)되고 있어 삶의 생기가 스민 곳이다.

괴시리에서 가장 주목받는 고택은 영양 남씨의 괴시파 종택이라고 할 수 있다. 한 눈에도 단아함과 정결한 기품이 느껴지는 이 고택은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75호로 소유자의 12대조인 남붕익이 17세기 말에 건립하였다. 정침과 사당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정침은 제사를 올리는 몸체 방으로써 정면 8칸, 측면 5칸 반 규모로 전형적인 `ㅁ`자 구조를 갖고 있다. 사당은 1900년 대 초 건립된 것으로 정면 3칸 측면 1칸 반의 규모로 맞배기와집이다. 수차례 보수로 인해 배치와 평면상에 있어 다소 변형이 있으나 조선시대 후기 주택 형태를 잘 간직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가옥이다.

경북 문화재 제198호로 지정된 물소와고택도 눈여겨 볼만한 가옥이다. 이 집은 조선조 좌승지(左承旨)에 추증된 물소와(勿小窩) 남택만(南澤萬)이 종가에서 분가한 후 그의 증손인 남유진이 건립하였다고 한다. 건립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안대청 위쪽 마루대를 받는 장여 밑에 `甲子 十二月 二十七日 辰時 上樑(갑자 12월 27일 진시 상량)`이라는 기록과 치목 수법이나 보존상태 및 건축 양식으로 볼 때 1924년에 새로 고친 것으로 보인다. 정면 5칸, 측면 6칸의 `ㅁ`자형으로 정침과 고방, 중문, 사랑 등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당시의 유교적 윤리에 의해 남, 녀의 생활공간이 엄격하게 분리되어 있다. 골목에서 바깥마당으로 출입할 때 사랑채 정면이 여성에게 노출되는 것을 방지하고, 사랑마당 오른쪽 구석에 있는 우물에서 여성이 가사작업을 할 때 노출 되는 것을 고려하여 중문간 앞과 담벽에서 중문간 쪽으로 약 6m정도의 담벽을 쌓아 놓았다.

골목이 이방인의 발길을 자연스레 안내한다. 유일하게 대문채가 있는 경주댁과 천전댁, 경주댁은 3성이 떠나기 전 수안 김씨가 살았던 집이라고 하니 꾀 오래된 집이다. 천전댁은 속칭 날개집이라 하여 안채와 사랑채가 이어져 있는 구조로 되어 있은데 이를 `只`자 형의 평면구조라 부른다. 19세기 전반기에 지어진 것으로 추측되는 천전댁은 경북도내의 전통 가옥 구조를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인 것이다. 이외에도 사랑방 전면 지붕이 박공으로 되어있는 사곡댁, 물소와 남택만(1729·1810)의 학덕을 추모하고 후손들에게 학습의 장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약 150년 전에 건립되었다는 와서당을 비롯하여 조선 영조 42년(1766) 남준형이 고려 말의 유학자 가정 이곡과 목은 이색을 기려 짓고 경목재(景牧齋)라 하였다는 一자형 정자 괴정(槐亭 경북문화재자료 397호)등 괴시리 마을은 현재 전통가옥 지정 문화재 20호와 비지정문화재 13호를 보유하고 있는 유산의 보고인 셈이다.

목은선생 기념관으로 오르는 길, 가랑비가 내리는 홍련암 마당에 서서 마을을 바라본다. 비에 젖은 기와들이 괴시리 마을을 더욱 선명하게 일으킨다. 이렇게 고풍스런 양반 마을이 왜 바닷가 근처에 형성되었을까? 마을 앞 영해평야와 그 너머 푸른 바다가 해답처럼 펼쳐져 있다. 드넓은 영해평야는 세도가들의 터전이 되기에 충분한 곡식과 자원을 생산했고 그곳에서 고풍스러운 유교문화가 탄생한 것이리라. 게다가 바다 가까이 있어 내륙에서 구하기 힘든 수산 자원을 수시로 구할 수 있었으니 그야말로 풍요로운 삶의 터전이었을 것이다. 수백 년 전 어느 저녁처럼 굴뚝에서 연기가 오른다. 목련나무 가지 끝으로 토독토독 봄이 내려앉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권선희(시인)

저작권자 © 경북매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