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길안의 한 골짜기, 작은 폭포와 너럭바위와 멋들어지게 어우러진 정자 하나가 있다. 정자 이름은 만휴정(晩休亭), 만년의 삶을 보내기 위한 정자라는 의미이다. 이 정자는 주변 경관의 아름다움만큼이나, 정자를 건립한 주인공의 삶 역시 아름답다. 이 정자의 주인은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청백리였던 김계행(係行)이다. 김계행은 1430년(세종 12)에 태어나서 1517년(중종 12) 8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취사(取斯), 호는 보백당(寶白堂)이다.

그는 17세의 어린 나이에 생원시에 입격(入格)하여 성균관에 들어갔으나, 문과는 많이 늦어져 51세가 되어서야 급제하였다.

하지만 과거 급제에 연연하거나 관직에 나가려고 초조해하지 않았다. 당대의 학자였던 점필재 김종직(宗直) 등과 교유하며 학문과 도덕 수양에 전념했다.

그리고 33세 때인 1462년(세조 8) 경상도 성주의 향학 교수를 시작으로 관로(官路)에 발을 들인 이후에는 관직의 고하를 따지지 않고 주어진 직분에 최선을 다할 뿐이었다.

이 때문에 그의 인격과 능력을 인정한 주변 사람들의 추천을 받아 대부분의 관직을 언관으로 지냈다. 홍문관 부제학, 사헌부 장령, 사간원 대사간 등을 두루 역임했다.

또 표연말(表沿沫), 최부(崔溥), 유숭조(柳崇祖) 등과 함께 사유(師儒)로 뽑혀 성균관 대사성을 지냈다.

그런데 이렇게 다양하고 화려한 관직 생활은 불과 17년 동안에 이뤄진 일이었다. 그만큼 관직 교체가 잦은 편이었다.

그것은 그가 임금의 노여움을 두려워하지 않고 직언(直言)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아무 하는 일 없이 관직이나 보전하는 것을 매우 부끄럽게 생각했다.

정책에 잘못이 있거나 천재지변이 일어나면 평소의 소신과 학문을 바탕으로 조리있게 비판했고 조금도 시류나 인기에 영합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외척의 전횡이나 총신의 부정부패, 제도적인 병폐에 대해서는 더욱 단호한 모습을 보였다.

그들의 행위로 인한 백성들의 피해와 국정의 혼란상을 상세히 비판하며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았다.

이 때문에 임금의 노여움을 사서 자주 관직에서 물러나야 했던 것이다.

하지만 머지않아 다시 등용되었고, 그때마다 관직은 조금씩 높아졌다. 그를 아끼는 동료들의 비호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에 대한 동료들의 애정은 그의 퇴직 이후 벌어졌던 두 차례의 사화에서도 잘 드러난다.

1498년(연산군 4) 그의 친우 김종직이 지은 `조의제문(弔義帝文)`이 원인이 되어 일어났던 무오사화에 그 역시 연루되어 국문(鞫問)을 받았다.

1504년(연산군 10)의 갑자사화에도 역시 연루되어 국문을 받았다.

연산군의 처형이었던 신수근(愼守謹)은 평소 외척과 내시의 부정부패에 대해 강경하게 비판했던 김계행을 미워하여, 갑자사화에 그를 끌어들여 해치려 했던 것이다.

또 그 이듬해에는 연산군이 내수사(內需司) 노비의 횡포를 지적했다는 이유로 그를 국문하라고 직접 명하기도 하였다.

연산군 말년의 몇 년 사이에 3차례 국문을 당하며, 생사의 기로에 섰던 것이다.

하지만 그때마다 그의 성품과 인격을 흠모하고 그의 희생을 안타까워하는 선후배 관원들의 적극적인 비호에 힘입어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정작 본인은 동료들과 죽음을 함께하지 못한 것을 죄스러워 했다.

그의 강직한 성품은 권력에 연연하지 않은데서 비롯되었다.

이는 그의 조카이자 국왕의 총애를 받던 국사(國師) 학조(學祖)와의 일화에서 잘 알 수 있다.

학조는 성주에 방문했다가 마침 성주의 향학 교수로 재직 중이던 숙부를 만나고자 했다. 그런데 직접 찾아뵙지 않고 숙부를 동헌으로 불렀다. 그는 가지 않았고, 학조가 어쩔 수 없이 직접 찾아가 뵈었다.

그러자 김계행은 `네가 임금의 은총을 믿고 방자하게 구는구나. 나이든 삼촌에게 찾아와 인사드리지 않고, 도리어 나를 부르느냐?` 하고 나무라면서, 살집이 터져 피가 나기 직전까지 회초리를 때렸다.

조금 뒤 학조가 변명하면서 `숙부께서 오랫동안 문과에 급제하지 못하셨는데, 혹 관직에 뜻이 있으면 힘을 써보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공이 화를 내면서 `내가 네 덕으로 관직에 오른다면, 다른 사람들을 무슨 면목으로 보겠느냐?` 하면서 더욱 엄하게 꾸짖었다고 한다.

당시 학조의 권세가 매우 커서, 그가 성을 내면 주변 분위기가 싸늘해질 정도였다. 김계행은 조금도 그에 개의치 않았을 뿐아니라, 학조가 권세를 믿고 방자한 행동을 할까봐 준엄하게 꾸짖었던 것이다.

이러한 성품은 연산군이 즉위한 이후 간언에 귀를 기울이지 않자, 사직하고 고향으로 은거한데서도 잘 드러난다.

그는 연산군 즉위 이후 대사간으로 재직하면서 외척과 권신(權臣)이 국왕의 총애를 믿고 온갖 횡포를 자행하자, 여러 차례 논박(駁)하며 잘못을 시정할 것을 건의하였다.

그러나 건의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사직 상소를 올리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임금의 잘못을 세 차례 간언하고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사직한다`는 선비의 도리를 실천한 것이었다.

그리고는 고향 집 옆에 보백당이라는 조그만 집을 짓고 은거하며 후진 양성과 자손 교육에 전념하면서 여생을 마쳤다.

그가 후진 양성에서 중요시했던 것은 첨렴결백한 처신이었다. 이러한 그의 심정을 대변하는 것이 보백당이라는 이름에 대한 해설로 지은 다음의 시이다.

吾家無寶物

우리 집에는 보물이 없네

寶物惟淸白

보물이 있다면 오직 청백뿐이네

자기 가문의 자랑은 청백한 삶을 유지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임종하면서 자손들에게 다음과 같이 당부하였다.

“대대로 청백한 삶을 살고 돈독한 우애와 독실한 효심을 유지하도록 하라. 세상의 헛된 명예를 얻으려 하지 마라”

이어 자신의 삶을 평가하면서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나는 오래동안 임금을 지척에서 뫼시었다. 그러나 조금도 임금의 은혜에 보답하지 못했다. 살았을 때 조금도 보탬이 되지 못했으니 장례 역시 간략하게 치르는 것이 좋겠다. 또 절대 비석을 세워 내 생애를 미화하는 비문을 남기지 말아라. 이는 거짓된 명성을 얻는 것이니, 매우 부끄러운 일이다”

자신이 모시던 연산군이 반정으로 쫓겨났다는 소식을 듣고 눈물을 흘리며 탄식했던 그로서는, 임금을 잘 보필하여 성군(聖君)을 만들지 못한 자책만 남은 삶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타락한 현실과 타협하지 않고 배운 바 지식과 도덕을 실천하는 데 주력했던 그 꼿꼿한 삶이 새삼 그립다.

이욱

(한국국학진흥원 고전국역실장)

저작권자 © 경북매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