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우 대구본부장
설. 어른들을 찾아 세배를 다녀왔다. 떡국을 먹고 또 한 살 더 먹어서인지 나이 드는 것이 새삼 어깨가 무겁고 발이 한 발 더 수렁으로 빠져 드는 느낌이다. 정초부터 나이 타령을 하는 것은 나이 드는 것이 두려워지기 때문이다.

어느 대폿집 벽에 “노인이 되면 남을 헐뜯는 소리나 군소릴랑 하지 말고 그저 묻는 말, 좋은 말만 하소”라고 낙서해 놓은 것을 본 적이 있다. 보아도 보지 못했고, 들어도 듣지 못했으며, 알아도 모른다고 하라 했다. 젊은 사람들의 세상이니 노인 된 주제를 알고 필요 없이 나서지 말고, 세상사 가는대로 맡겨두는 것이 오늘을 사는 지혜라는 가르침이었다.

그러고 보니 노인의 처세술이란 게 따로 있는 듯도 하다. `말은 적게 하고, 지갑은 많이 열어라` 뭐 이런 것들이다. 죄다 세상의 주역이었음을 잊어버리고 뒷전으로 물러나 주는 대로 먹고 살아라는 식이다. 나이 먹는 것이 두려워 지는 것은 거꾸로 나이가 들수록 나이에 대해 긍정적으로 바뀌어가고 있다는 솔직한 자기변명이기도 하다.

지난 대한 추위 때 고교 동창 상사에 조문을 다녀왔다. 아들 다섯이 나란히 상주 노릇을 하고 있었는데 고인은 정확히 100수를 누리셨다는 것이다. 수많은 조문객들이 고인의 덕을 추모하며 아울러 자식들의 효도를 칭송했다. 노인의 장수보다도 그 나이가 되도록 가정의 어른으로 우뚝할 수 있었던 자식들의 화목함이 부러웠던 것이다. 그 긴 세월 남들이 모르는 간난이 없지 않았을 것이로되 한 인간의 죽음 앞에서 고결함이 느껴지는 것은 온전히 그의 인생사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인간 수명 100세가 이젠 드물지 않을 것 같다. 2010년 말 현재 우리나라 인구 중 65세 이상은 535만7천명으로 총인구 4천887만5천명의 11%, 이미 고령화 사회를 한참 지났고, 경북은 65세 이상이 16.1%로 진작 고령 사회로 진입해 있다. 통계청의 추계대로라면 10년 후가 되면 우리나라 전체가 고령사회로 넘어가 있고 경북은 초고령사회가 된다.

노인에 대한 현재 우리 주변의 상황들은 노인에 대한 정의를 바꾸게 만든다. 경로당에서 70세는 온갖 궂은 일을 도맡아야 할 아직 청춘이다. 그렇다면 이젠 노인들에 대한 일자리 문제에서부터 건강이나 복지 등 모든 문제들이 단순히 노인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에서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5·16 혁명을 성공했을 때, 그의 나이 44세였다. 그는 혁명정부의 많은 일들을 젊은 참모들과 논의했다. 속도와 결단력, 추진력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러다가 20년 가까이 장기집권하면서 젊은이들의 패기보다 나이 든 참모들의 경륜이 필요함을 느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나이 든 노인에 대해서는 세상 변화를 의식적으로 거부하고 환경 변화에 둔감하고 판단력이 흐리며 결정이 늦다고 치부하는 경향이 있다.

분초를 다투는 디지털시대에 노인의 지혜 따위가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지혜는 지식 뿐 아니라 경륜에서 얻어진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65세에 KFC를 창립해 세계적 성공을 거둔 할랜드 샌더의 이야기는 나이가 그냥 숫자에 불과함을 인식시켜주는 대표적 사례이다. 할랜드의 일화는 고령 사회에서는 이제 더 이상 노인의 성공 신화로서 의의를 잃게 됐다. 대신 실패를 극복한 의지의 표상 쯤으로 각인될 만하다.

`집에 노인이 안 계시면 빌려서라도 모셔라` 라는 서양 속담이 있다. 인생 100세가 남의 이야기가 아닌 실제 상황이 되는 세상이다. 가정이나 국가나 모두가 노인과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 노인들의 경륜이 사회 발전의 한 축이 되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나이 드는 것이 축복이 되는 사회가 진정한 복지 국가가 아닐까. 그렇다면 노인에게 일자리를 주는 것은 청년에게 일자리를 주는 것만큼이나 중요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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