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수와 견주던 배 목수 인기… “그때가 참말 좋았어”

목선 제작 중 휴식을 취하는 목수
뱃공장 언덕에 올라 구룡포항을 바라본다. 가리비처럼 오목하게 휘어진 포구를 따라 옹기종기 앉은 집들이 따개비 같다. 지난밤을 어화(漁火)로 수놓던 수평선 고요하고 내항에 정박한 배들은 끼걱끼걱 물살을 타며 잠시 휴식 중이다. 뱃공장엔 수리를 위해 오른 배 한 척 젖은 밑동을 말리고 있다. 녹슨 레일 위로 칼바람이 다녀간다.

목선 제조 힘든 일 탓 수입 두둑… 부러울 것 없었던 시절

1970년대 후반 철선 등장하며 제철소 막노동꾼으로 떠나

“세상 부러울 기 없었데이. 술집에서 술로 묵고 있으믄 사장이 돈을 들고 와가 술값 다 내주고 외려 일 좀 해줄라꼬 통 사정할 정도였다 아이가. 주머니가 두둑하니 처자들한테도 인기가 좋았지. 그 때는 중국집 가가 탕수육 하나 떠억 시키놓고 있으믄 처자들 입이 떡떡 벌어졌데이. 하모, 인기가 좋고 말고지. 그래그래 삼정골 처자들캉 몰려다니며 극장도 가고 했는데 한날은 친구가 고 이웃 마을 들포에 사는 처자로 소개해 주는 기라. 마 보이 곱데. 그래가 뻔질나게 일만 마치믄 들포로 앤갔나. 그라이 마 삼정 처자들이 샘을 놓아가 하루는 우리집 양철지붕에다가 돌멩이를 던지고 난리도 아니었다. 오밤중에 우당탕 소리가 나고 말이지. 아고, 그때가 참말로 좋았다”

한 때 바다산업이 그야말로 호황일 때 `군수한테 시집갈래, 배목수한테 시집갈래?`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조선소 배목수는 수입이 많았다. 그러나 1970년대 후반에 생겨난 철선과 이어 나타난 FRP선으로 인해 1985년 경 목선은 서서히 자취를 감추었다. 목선은 부식이 없고 물에 잠기면 잠길수록 단단해지는 특성을 갖고 있었지만, 활어를 저장할 공간이 없었다. 그에 비해 FRP선은 수조가 있었기에 비싼 값에 활어를 판매 하는데 매우 긴요하게 쓰였던 것이다.

열너댓 살쯤 들어간 뱃공장에서 처음 해야 했던 일은 물을 날라 오는 것이었다. 가파른 경사를 올라 가장 시원하다는 집 물을 동이로 받아오면 목수들은 한여름 더위를 그것으로 식히곤 했다. 하루 종일 물지게를 나르는 일에 이골이 날 즈음 연장을 가는 일을 맡겼다. 몇 년 동안 수없이 연장 가는 일을 반복하고 칠하는 것을 배우고 난 뒤 자를 재는 법을 배웠다. 그렇게 숙달된 배목수들의 호흡과 기술을 어깨너머로 자연스레 익히고서야 배를 만드는 작업에 합류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때만 해도 주문량이 밀려 당시 네 개였던 뱃공장 모두가 다투듯 배를 만들어 냈고, 일이 힘든 만큼 기술자들의 대우가 좋아 사는 재미가 있었다.

한창 때는 둘이서 배 한 척을 만들기도 했다. 부산에서 수입 원목을 주문하여 가져오면 한 달 정도 자연풍에 말렸다. 잘 마른 원목을 물에 불린 후 켜서 널빤지를 만들고 20cm나 되는 긴 배못으로 박아 붙였다. 처음에 선미를 만들고 밑에 용골, 그러니까 척추에 해당하는 것을 놓고 갈비뼈에 해당하는 곳은 질 좋은 육송을 사용하였다. 밑바닥 살을 먼저 붙인 다음 위를 붙였고 아무리 야물게 붙여도 생겨나는 틈은 일본말로 `마끼다`라는 풀로 메웠는데 그것을 `밥을 친다`고 했다. 또 휘어지는 부분은 양잿물을 넣고 나무를 푹 삶아 붙이는데 그 공정이 까다로워 그 일을 하기 전날은 아내와의 잠자리도 멀리 해야 했다. 선미가 제대로 맞지 않으면 선주에게도 미안하고 사주에게도 미안할뿐더러 정작 자신의 기술에 실망하게 되어 맥이 빠지기 때문에 특히나 공을 들였던 것이다. 그렇게 제작되는 목선의 크기는 작게는 17자 0.8t짜리에서 구 톤수는 80t, 신 톤수로는 60t짜리인 68자 까지 였는데 그 목선의 수명은 약 30년 정도로 철선이나 FRP선 보다 훨씬 길었다.

“목선 한 척이 완성되믄 볼만 했데이. 선주는 무당으로 불러가 선왕대에 만선기를 꽂고 순항과 만선을 기원했지. 그 당시엔 왜식 풍습이 남아 있었던 탓에 술도 한 말 받아놓고 떡도 한 말씩 해서 잘 차렸다. 떡 속에 드믄 드믄 돈을 쑤시여가 던지면 사램들이 행운을 줍느라꼬 난리가 났었다. 마지막으로 나무로 된 고임새를 빼믄 선주와 선원들이 탄 배가 주르르 바다로 미끄러져 드갔지. 배목수들은 배가 물에 닿는 순간 잠기는 위치를 숨죽여 들바다보았고 구경꾼들은 마 성공했다꼬 환호했다. 배를 보낸 뒤에도 내가 만든 배가 만선으로 돌아온다카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덩달아 신이 났던 시절이었재”

2년 전, 목선 한 척이 옛 기법 그대로 제작되어 `광명호`란 이름을 달고 하정리 축양장으로 갔다. 서넛의 배목수가 약 40일 간 제작한 목선은 FRP보다 가격이 훨씬 비싸지만, 아직도 축양장에선 간간이 목선을 쓴다. 가벼운 FRP선에 비해 태풍이나 해일에 쉽게 떠내려가지 않는 장점을 가졌기 때문이다. 언제 다시 목선 주문이 들어올 지는 기약이 없다.

배목수들은 하나 둘 제철소 막노동꾼으로 떠나갔다. 그나마 남은 사람들은 간간이 철선과 FRP선 수리를 하며 생계를 잇고 있다. 늙은 배목수가 모닥불에 언 손을 녹이며 바다를 바라본다. 머언 기억 속, 뚝딱뚝딱 나무 두드리는 소리 쉼 없이 들리는 뱃공장으로 다시 돌아가고 있다.

/권선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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