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조지훈 `봉황수`

<봉황수> ……………… 조지훈

벌레 먹은 두리기둥, 빛 낡은 단청, 풍경 소리 날러간 추녀 끝에는 산새도 비둘기도 둥주리를 마구 쳤다. 큰 나라 섬기다 거미줄 친 옥좌(玉座) 위엔 여의주 희롱하는 쌍룡 대신에 두 마리 봉황새를 틀어 올렸다. 어느 땐들 봉황이 울었으랴만 푸르른 하늘 밑 추석(雛石)을 밟고 가는 나의 그림자. 패옥(佩玉) 소리도 없었다. 품석(品石) 옆에서 정일품, 종구품 어느 줄에도 나의 몸 둘 곳은 바이없었다. 눈물이 속된 줄을 모를 양이면 봉황새야 구천(九天)에 호곡(呼哭)하리라.

근대가 다가오자 이전 시대의 가치는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게 되었다. 근대는 과거를 철저하게 부정하면서 자신의 존재를 빛내었다. 그리고 우리에게 근대는 일제에 의해 강요된 것이었기에 과거와의 단절은 더욱 폭력적이었다. 이런 시대에 조지훈의`봉황수`는 불가항력적으로 닥친 근대의 힘에 허물어지는 전근대의 풍경을 기품 있게 그린 작품으로 의미를 지닌다.

이 시에서 시인은 지금 고궁에 와서 권위를 상실한 과거를 보고 있다. 왕조의 몰락으로 왕궁은 황폐해져 있다. 기둥은 벌레들에게 먹히고 단청은 빛이 낡고, 새들은 둥지를 마구 친 것이다. 시인은 몰락의 원인을 “큰 나라 섬기”던 일에서 찾고 있다. 그 결과 옥좌 위엔 “여의주 희롱하는 쌍룡 대신에 두 마리 봉황새를 틀어 올”린 것이다.

이 봉황을 두고 해방 직후에 설전이 벌어졌다. 이육사의 동생으로, 당대 유명 평론가로 활약하던 이원조가 조지훈의 사상적 보수성을 비판하면서, 지나가는 말로 “아마 덕수궁 내의 중화전 천정에 새겨 있는 악작(?)을 봉황으로 잘못 알았을 것”이라 한 것이다. 이 말은 이 시에 나오는 봉황이 정확하게 말하자면 봉황이 아니라 악작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조지훈은 발끈하여 반박하고 나섰다. 먼저 덕수궁 중화전 천정에는 악작이나 봉황이 없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즉 거기에는 봉황이 아니라 쌍용이 있다는 것이다. 중화전에는 처음부터 봉황이 없었다. 중화전은 덕수궁(경운궁)의 정전(正殿)으로 1902년에 처음 세워졌고, 이후 1904년 화재로 소실된 후, 1906년에 단층으로 다시 지었다. 이때 천정에 봉황을 그릴 이유가 사라졌기 때문에 처음부터 쌍룡이 그려져 있었다. 이원조가 이 점을 놓친 것이다.

전통적으로 용은 천자 즉, 황제의 상징이며, 봉황은 제후의 상징이다. 성리학의 영향으로 사대의식이 분명했던 조선시대 궁전에는 천정이나 옥좌 위에 모두 봉황을 상징으로 장식하였다. 창경궁 명정전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이 시에서 시인이 말하는 것은 바로 이곳으로 보인다. 여기에는 봉황 두 마리가 서로 마주 보고 날고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그러나 1897년 10월11일에 고종이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하고, 그 다음날 경운궁 환구단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황제에 즉위하였다. 그리고 민비를 황후로 추존하였다. 이제 조선은 대한제국이 되고, 왕은 황제가 됨으로써 덕수궁 명정전에는 봉황 대신 쌍룡을 그릴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즉위식 직전까지 쓰고 있던 경복궁 근정전 천정 그림도 쌍룡으로 바꾸었다. 황제의 시무복도 황룡을 그린 황룡포를 교체하였다. 이는 `대명회전(大明會典)`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모든 왕궁의 봉황을 쌍룡으로 변경한 것은 아니다. 창덕궁 인정전이나, 창경궁 명정전의 그림은 그대로 두었다. 이것은 고종의 황제 등극이 중국과 조선의 관계를 악화시키려는 일제의 의도에 의한 것이었기에, 일종의 균형감각을 위해 남겨 두었던 것이다. 고종이 사용하는 궁궐에는 쌍용을 사용하고, 그렇지 않은 곳에는 봉황을 그대로 두었던 것이다.

이원조의 비판에 대해 조지훈이 다음으로 반박한 것은 악작도 봉황이라는 것이다. 허신의 `설문해자`라는 책에 `악작은 봉황의 일종`이라 한 구절과 금경(禽經), 시경, 사원(辭源), 본초강목 등의 전거를 활용하고 있다. 조지훈은 장화(張華)의 금경주(禽經注)에 나오는 `봉황의 작은 것을 악작이라 한다`는 말도 예로 들고 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조지훈이 이원조의 `악작`이라는 이름에 대해서는 반론을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즉 둘 다 우리 궁궐에 그려진 봉황이라 통칭되던 새를 악작으로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봉황수`라는 제목을 고려한다면, 조지훈은 이원조의 지적에 대해 `악작이 아니라 봉황`이라고 주장해야 논리적으로 일관성이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한 발 물러나 “악작을 봉황으로 안 것이 무엇이 잘못이란 말인가” 하고 반박하고 있다.

조지훈이 왜 이원조의 악작설을 인정한 것일까. 고전에 밝은 두 사람이 이런 합의에 도달한 것이 어디에 근거한 것인지는 현재로선 알 수 없다. 다만 조지훈이 다소 수세에 처해 있다는 느낌을 떨치기 어렵다. 그러나 조지훈은 이원조의 이런 지적이 “문학에 대한 편달보다는 아무래도 당파의식에서 나온 적대감”에 기인한 것임을 지적함으로써 이런 지적을 평가절하하고 있다.

이런 논쟁은 아무나 할 수 없는 것, 즉 “체질적 뿌리가 같은”(김윤식) 이 두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전문 영역의 것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그러나 이 논쟁이 `봉황수`에 담긴 조지훈의 생각을 폄하하지는 않는다.

이 시가 중요한 것은 악작이냐 봉황이냐를 판별하는 데 있지 않고, 강요된 근대에 의해 몰락한 전통이 현재 우리에게 남아 있지 않음을 강조한 데 있다. 그래서 품석 어디에도 설 곳이 없다는 탄식은 “위정척사파 계통의 몰락양반”(유종호)의 감각이 아니라 주체적인 전통주의자로서의 감각에 의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조지훈은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아직 낡은 것, 벌레 먹은 것까지라도 우리 민족의 주체정신을 자극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나 노래해야 할 것이라고 믿는다”

<경북대 국어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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