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는 내륙과 해안을 고르게 품고 있어 역사적, 문화적 특성이 다양하다. 특히 포항, 영덕, 울진, 경주, 울릉에 이르는 해안지역은 바다의 영향을 받은 여러 형태의 서민 문화를 형성하고 있다. 그러나 소박한 삶에서 자연스럽게 발생해 역사의 원동력이 됐던 유·무형의 자원들은 세월과 산업화에 밀려 서서히 사라지고 있다. 민초들의 숨소리가 살아있는 이야기를 찾아 기록하고, 보존하고, 확산시키는 것은 현대사회가 반드시 해야 할 의무이며 가장 필요한 처방이다. 2011년, 경북매일은 지역의 해양관련 문화를 찾아 떠난다. 경북 동해권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길과 사람, 풍습과 전설을 통해 삶에 대한 진정성을 인식하고 지역의 고유한 가치를 재발견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편집자 주>

말들의 행렬이 돌문을 지나간다. 문지기는 말의 숫자를 세느라 바쁘고 말발굽 소리 요란한 돌문 일대는 구경 나온 사람들로 북적인다. 온몸이 검고 네 발과 이마에 흰털이 난 말 한 마리가 앞다리를 치켜들고 크게 울부짖었다. 먼 길을 걸어 온 말들은 다시 갈기를 세우고 드넓은 목장을 향해 힘차게 뛰기 시작했다.

포항시 남구 구룡포 일대엔 군마를 사육했던 장기목장이 있었다. 설치시기를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장기목장의 기록을 가장 먼저 확인할 수 있는 경상도속찬지리지를 통해 적어도 600여년은 넘었을 것이라 추측한다. 구룡포읍내 말이 들던 돌문을 시작으로 눌태 구릉지, 응암산(해발 158m), 공개산(해발 214m) 서북쪽을 거쳐 동해면 흥환에 이르는 구간엔 아직도 약 5km 가량의 석책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경상도속찬지리지에 의하면 울산 3곳(방어진목장: 둘레 47리, 말 360필, 암산장: 둘레 57리 소길관: 둘레 40여리), 동래 3곳(석포목장 둘레 28리, 말 232필. 절영도목장: 둘레 48리, 소 276두, 오해지목장: 둘레 186리, 말 793필)이 있었다고 한다. 이에 비해 장기목장은 둘레가 120리, 방목하는 말이 1천6필 이었다니 경상도의 타목장에 비해 대규모로 운영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장기곶의 위치나 지리적 여건이 목장으로 매우 적합한 지역이었고 구룡포와 흥환을 가로지르는 돌울타리를 쌓음으로서 거대한 목장터를 쉽게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장기목장내에는 말을 물 먹이는 못이 50군데, 말이 눈과 비를 피하는 가가(假家) 19채가 있었으며 매년 9~10월 울산과 장기의 목장에서 각각 2필의 말을 골라 조정에 진상했다.

목장을 관리하는 종 6품관직으로 울산 남목에서 장기목장까지 관할했고 목장내에서 근무하는 목자는 141명으로 매일 6명이 마분을 치우고 말을 사육, 관리했다. 그리고 문지기 2명과 감고(感考) 1명, 관마를 잡아먹는 호랑이를 잡는 별포수도 30명이나 있었다. 목장석책의 수축은 매년 8월 목민(牧民)이 했고 목장내 백성은 목장내 사역만을 했으며 장기현이나 연일현의 어로작업에 일체 동원할 수 없었다.

우리나라에서 본격적으로 말을 길렀던 것은 삼국시대부터로 추정된다. 삼국사기 신라 문무왕조에는 “전국에 174여개의 `거`가 설치됐다”라는 기록이 있는데 `거`라는 것은 산곡에 금수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아 놓고 말을 기르는 목장의 명칭이다.

고려시대에 들어와선 국방에 긴요한 말의 사육을 중요시해 마정(馬政)을 철저히 했다. 조선 태조 때는 전관목장이 세워졌으며 세조대에 이르러 강원도 일대에 목장이 설치됐다.

이 시기에 발간된 `신편집성마의방(新編集成馬醫方)`, `우의방(牛醫方)`, `마의서(馬醫書)`, `우마양저염역병치료방(牛馬羊猪染疫病治療方)` 등의 서적은 가축의 전염병과 질병을 전문적으로 치료하는데 많은 도움을 줬다.

그렇다면 능선마루를 의젓하게 펴고 군마(軍馬)의 기상을 일으키던 말들, 눈망울 가득 푸른 동해를 담고 풀을 뜯던 그 많은 말들은 어디로 갔을까? 대규모로 사육되던 말들이 이 땅에서 종적을 감춘 이유를 두 가지로 미뤄 짐작해 본다. 세종대왕은 20여종(말의 털색으로 구분)의 준마를 안정적으로 생산하는데 성공했다. 말 개량에 성공한 조선은 당대 동아시아 최고의 말 생산국으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말에 대한 욕심이 큰 명나라는 매년 1천마리의 말을 상납할 것을 조선에 명령했다. 중국의 왕조가 명에서 청으로 바뀐 후에도 계속 말 상납은 이어졌다. 조선은 크고 좋은 말을 보유할 수 없게 됐고 그로 인해 임진왜란, 병자호란 때 고전을 면치 못했다. 따라서 작고 볼품없는 말이 남아 번식을 하다 보니 덩치는 점점 작아졌고 군마로서의 경쟁력을 잃었던 것이다. 장기목장의 경우도 양난이후 효종대의 재정비과정에서 울산목장의 속목으로 속해 조선말기까지 운영됐으나 1905년 을사조약체결을 계기로 완전히 폐장됐다.

또 하나는 일제에 관련된 것이다. 일본인들의 말에 대한 애정은 각별했다. 일본은 메이지천황이 마필개량을 지시했던 4월7일을 애마일(愛馬日)로 정한 것을 시작으로 전국적으로 요란한 말 행사를 열었다. 서울에서는 400여두의 군마와 민간마가 시가행진을 하는 애마행진을 비롯해 군마 전시회, 군마미담(軍馬美談)강연회, 여학생들이 당근과 물을 말들에게 먹이는 애마봉사 등의 행사가 개최됐고 극장에선 애마선전영화도 상영했다. 심지어 1942년 6월10일 용산역 앞에선 한 마리의 말을 고향으로 돌려보내면서 거창한 환송행사를 열기도 했다.

일제의 애마정신은 군마에 대한 필요성을 강조한 것으로 정치적 선전의 일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대에 이르러 마문화가 척박해진 이유는 군마의 필요성이 사라진 것과 함께 오랜 침략과 점령에 대한 반일 감정 또한 어느 정도 작용했기 때문은 아닐까.

장기목장에서 말이 사라진 지 100여년이 흘렀다. 이제 말이 들던 돌문도 무너지고 말목장과 연관된 몇몇 상호와 말봉재라는 지명만이 남았다. 그러나 길고 긴 석책은 낡아 무너질지언정 그것이 품은 이야기는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귀 기울이면 들릴 것이다. 여전히 목장성터를 휘도는 힘찬 말발굽 소리, 동해의 깊고 푸른 물결처럼.

글/권선희(시인)

권선희 시인은 서울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시집 `구룡포로 간다`(2007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우수도서 선정), 르포집 `예술밥 먹는 사람들(공저)`, `구룡포에 살았다(2인 공저)`, 국토해양부 선정 해안누리길 도보여행기 `바다를 걷다, 해안누리길`, 항해기 `우리는 한배를 탔다` 등이 있으며 제1회 대한민국해양영토대장정 기록작가로 참가, 2천100km 바닷길을 항해했다. 한국작가회의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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