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쟁 싫어 도산에 은거… 청량산 벗하며 학문 집대성

고산정 전경
경상북도는 조선시대 영남학파의 본산으로서 풍부한 정신문화적 요소를 간직하고 있는 유교의 고장이다.

경북매일은 2011년 새해를 맞아 경북의 이러한 우수한 전통문화를 선현들의 행적에 초점을 맞추어 조명함으로써 그 잠재력을 확인하고 이를 통해 디지털 시대에 부응하는 새로운 문화적 자산으로 활용하는 방안을 화두로 제시한다.

<편집자 주>

50대 초반 벼슬에서 완전히 물러나 도산(陶山)으로 낙향한 지 10여년 남짓 되던 어느 해, 퇴계 이황(1501~1570)은 오랜만에 청량산 유람길에 올랐다가 시 한수를 짓는다. 지금의 농암종택 아래에 있는 학소대 기암절벽을 밀쳐내듯 튕기며 휘돌아 내리는 낙동강이 일직선으로 넘실대며 장대한 풍광을 이루고 있는 곳에 이르러서였다. `치런치런 흘러넘치는 물이 긴 못을 이룬다`는 뜻에서 스스로 미천장담(彌川長潭)이라 이름한 곳에서 퇴계는 같은 제목의 시를 지었다.

한참을 생각하네, 어릴 적 예서 낚시 하던 일,

삼십년 세월 티끌에 묻혀 자연을 등졌네.

돌아와 보니 산천은 여전한데,

모를레라, 산천이 이 늙은 얼굴 알아볼 수 있을런지.

벼슬길에서 이렇듯 그리던 고향으로 퇴계가 돌아온 것은 나이 50여세를 넘기고서였다. 34세에 문과에 급제해 첫 벼슬길에 올랐던 퇴계는 49세 되던 해인 1549년 풍기군수를 끝으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그뒤 성균관 대사성에 임명돼 잠시 복직 하기도 했지만 그마저도 이내 물러나고, 53세 이후로는 잦은 조정의 부름에도 병을 핑계로 사퇴를 반복하며 나아가지 않았다. 퇴계가 벼슬에 더 이상 나아가지 않은 것은 평소 병약했던 건강문제도 있었지만, 당시의 정치적 상황 역시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특히 1545년의 을사사화에 이어 1547년에 일어난 양재역 벽서사건은 퇴계로 하여금 은퇴를 결심하게 만든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그는 이 사건으로 존경하던 동향 선배들인 충재 권벌과 회재 이언적이 귀양을 가는 모습을 보게 되고, 급기야는 평소 따르던 넷째 형마저 태형 끝에 귀양길에서 객사하는 불행을 겪는다.

이런 일련의 정치적 풍파를 계기로 낙향을 결심한 퇴계는 고향에 돌아온 뒤 지금의 종택 인근에 계상서당을 짓고 학문연마와 후학교육에 몰두했다. 퇴계의 중요한 학문적 업적은 낙향 직후인 50세 초반부터 70세로 죽을 때까지, 약 20여년간의 도산 은거 시기에 집중적으로 이뤄졌다. 유명한 고봉 기대승과의 사단칠정 논쟁이 진행된 때도 이 무렵이고, `성학십도` 등 주옥같은 저술들이 집대성된 것도 이 시기이다. 비록 당시의 정치적 풍향에 따른 불가피한 선택의 일면도 있지만, 결과적으로 도산 은거는 퇴계의 일생에서는 이처럼 가장 찬란한 황금기였다.

낙향 후 퇴계는 학문과 교육에 몰두하면서 틈틈이 어릴 적 추억이 곳곳에 배어 있는 도산의 산수를 소요하며, 자신이 `천석고황`이라고 불렀던 `자연을 떠나서는 살지 못하는 고질병`도 기꺼이 즐겨 앓았다. 그 가운데에서도 도산에서 청량산에 이르는 낙동강변의 오솔길은 퇴계에게는 특별한 길이었다.

그 길은 어릴 적 또래들과 올망졸망 낚시를 하러 다니던 놀이의 길이었고, 조금 커서는 공부를 위해 형과 함께 청량산으로 숙부인 송재 이우의 거처를 찾아 오르내리던 배움의 길이였다. 그런가 하면 또 먼저 낙향해 있던 고향 선배인 강호문학의 대가 농암 이현보와 함께 강변 너럭바위에 걸터앉아 시를 주고받던 탈속의 길이기도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 길은 궁극으로 마음 속 성지인 청량산으로 퇴계 자신을 인도해주는 성찰의 길이었다.

청량산에 대한 퇴계의 애정은 관직에 있는 동안 청량산인(淸凉山人)이라는 호를 쓰기도 했고, 벼슬에서 물러나 낙향한 뒤에는 청량산을 아예 `우리 집안 산`, 즉 `오가산(吾家山)`이라고 불렀다는 사실로부터 명징하게 드러난다. 퇴계가 청량산을 이처럼 사랑한 것은 추억이 깃들어 있는 곳이라는 이유 외에도 그것이 자신이 평생 추구했던 학문의 목표를 상징하는 것이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퇴계가 정진한 학문은 중국 송나라의 사상가 주희가 세운 주자학이었다. 이런 점에서 퇴계에게 주희는 평생에 걸친 롤모델이었다. 이 때문에 퇴계는 주희가 복건성에 있는 무이산에 무이구곡을 정한 후 제5곡에 무이정사를 짓고 학문에 정진했던 행적을 자신의 삶속에 재현하고자 갈망했다. 따라서 퇴계가 1561년 도산구곡의 제5곡인 탁영곡 위에 도산서당을 지은 것도 우연이 아니다. 비록 청량산에서 도산에 이르는 낙동강 아홉 구비를 도산구곡으로 확정하고 각각에 이름을 붙인 것은 후대의 일이지만, 퇴계 자신의 마음속에는 이미 도산구곡의 이미지가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퇴계에게 청량산은 무이산이었고, 도산서당은 곧 무이정사였던 셈이다.

그러므로 퇴계가 걷던 도산에서 청량산에 이르는 강변길은 단순한 유람의 길이 아니다. 그것은 사색의 길이고, 수양의 길이고, 옛 선현의 흔적을 더듬는 성찰의 길이었다. 퇴계가 그 길을 `옛 사람`이 몸소 걷던 자취를 따르고자 하는 자기 마음 속의 길이라는 뜻에서 `도산십이곡` 연시조에서 `예던 길`이라고 부른 것도 이 때문이다.

고인(古人)도 날 못 보고 나도 고인 못 뵈

고인을 못 뵈도 예던 길 앞에 있네

예던 길 앞에 있거늘 아니 예고 어쩔고

`예던` 그 길과 도산구곡은 70년대 중반에 이루어진 안동댐 건설로 지금은 많은 부분이 원형을 잃었다. 도산구곡의 경우 오천 군자리에서 시작되는 제1곡 운암곡부터 제2곡 월천곡을 거쳐 제3곡 오담곡, 제4곡 분천곡 그리고 도산서원 앞의 제5곡 탁영곡과 이육사문학관 앞의 제6곡 천사곡은 옛 모습을 찾기가 어렵다. 하지만 제7곡 단사곡부터 제8곡 고산곡, 제9곡 청량곡은 다행히 아직도 옛 모습의 일단을 간직하고 있다. 특히 단사곡에서 고산곡으로 이어지는 여정에는 미천장담을 필두로 경암(景巖), 한속담(寒粟潭), 학소대(鶴巢臺), 월명담(月明潭), 고산정(孤山亭) 등 퇴계의 시와 관련된 역사속 현장들이 여전히 남아 있어 예던 길의 향취를 오롯이 전해준다.

퇴계는 지인에게 보낸 시에서 예던 길을 그림 속 풍광이라고 표현하면서, 그 길을 걷는 것을 그림 속으로 들어간다고 묘사했다. 퇴계가 말한 `그림`은 애로라지 풍광의 아름다움만을 나타내기 위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것은 선현을 닮고자 했던, 평생을 마음으로 그렸던 자신의 염원을 담아낸 표현이 아니었을까?

/박원재

(한국국학진흥원 수석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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