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우대구본부장
참호전투가 따로 없다. 마치 연례행사처럼 연말이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집단패싸움이다. 저고리를 벗어젖힌 채 멱살잡이를 하는 와이셔츠 차림의 멀쩡한(?) 신사들 사이에 더러는 숙녀도 끼어있다. 안방으로 생중계되는 이 경기는 그야말로 `국민을 위해` 사생결단하고 있는 모습이다. 올 해는 여당인 한나라당이 이겼다.

309,056,700,000,000원. 그런 활극을 벌이는 사이에 2011년 우리나라 예산 309조원이 통과됐다. 국민으로서 마치 네다바이를 당한 느낌이다. 학창시절 하굣길에서 버스비 아껴 모은 지갑을 송두리째 날려 버린 경험이 떠올랐다. 야바위꾼의 기막힌 손놀림에 정신을 파는 사이 어느 새 내 지갑이 달아나 버린.

미안해서 그랬나. 1년 내내 국민위에 군림하면서 거드름피우고, 그러면서 막판에 그 많은 예산안을 통과시킬려니 국민 보기에 면목이 없어서 그랬나. 아니면 그랬을 턱이 없다. 적어도 국민 보기에 “우린 이만큼 노력했다”는 모습을 보이려고, 어떤 의원은 입술이 터지고 또 다른 의원은 셔츠가 찢어지고, 카메라에 잡히는 의원들의 모습은 정말 국민들의 혈세를 제대로 심사하기 위해 몸 던지는 모습이었다.

고작 1박2일이다. 의회에서 난리를 피운 시간이. 최대 쟁점인 4대강 사업을 놓고 한 쪽은 “반드시 해야 한다”였고 반대쪽은 “해서는 안 된다”였다. 그걸로 시간을 떼우다가 막판에 가서는 활극으로 마감을 한 것이다. 민주당으로서는 합의해 줄 성질이 못된다고 미리 선을 그었다. 그렇다면 한나라당의 171석에 비해 고작 87석인 태생적 한계를 갖고 있는 민주당으로선 `할 만큼 했다`는 표시를 한 셈이다. 국민눈에 얼마나 장렬하게, 치열하게 투쟁했는냐로 비쳐지는데 위안을 삼는 모습이다.

올해가 처음도 아니다. 그나마 정기국회 회기(9일)안에 예산안이 처리된 것은 2002년 이후 8년 만에 처음이니 저간의 사정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겠다. 국회의장이 직권상정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야당은 결사저지를 선언했고 그러면서 점거와 농성이 연례행사처럼 진행됐다. 2010년 예산안은 지난해 12월31일에야 겨우 통과됐다.

의원들은 당분간 어색해 할 것이다. 언론도 `정국 경색` `여야 급속 냉각`이라고 설레발치고 있다. 야당은 날치기 통과 무효라며 장외투쟁을 선언했다. 여당도 중요한 서민 예산을 챙기지 못한 데 대한 책임을 놓고 공방을 벌이고 있다. 그러나 그런 분란과 질책들이 마치 짜고 친 고스톱을 국민들이 눈치 챌까봐 연막을 치는 것처럼 보인다. 의원들은 한마당 활극이 국민 세금을 네다바이했다는 죄의식을 면죄부로 바꿔주었다고 자위할 것임에 틀림없다. 여야의 사활을 건 몸싸움 사이에도 자기 지역 예산을 챙긴 것으로 드러난 것이 그 증거다.

중앙 정부에만 그런 짜고 치는 고스톱이 있는 것이 아니다. 대구시의회 경제교통위원회가 삭감한 대구FC 예산 10억6천만원이 예산결산특별위 계수조정소위원회에서 극적으로 소생했다. 소위에서 자정을 넘기면서 격론을 벌였지만 결론이 나지 않아 결국 무기명비밀투표로 살아난 것이다. 대구시 관계자가 읍소하고 대구FC에서 “새롭게 태어나겠다”며 한 번 더 기회를 달라고 부탁했다. 대구시민구단 대구 FC의 올 해 K리그 전적은 5승4무19패로 15개 구단 중 꼴찌였다. 상임위원들은 “3년동안 경고했는데도 소명조차 없었다”며 삭감을 장담했으나 결국 살아났으니, 이 또한 쇼 한번 해 본 것인가.

경북도의회도 기획경제위원회가 대구경북연구원의 내년 지원 예산 30억원을 몽땅 깎아버렸다. 도의회의 행정사무감사에서 지원 예산에 대해 분명하게 소명하지 못하는 등 역할에 회의적이었다는 지적과 함께 대구와 경북을 분리해서 경북연구원을 세워야 한다는 둥 불협음이 나오고 있는 판이다. 정말 깎으려 한 것인지, 쇼를 벌인 것인지 예결위의 결정을 지역민들은 지켜볼 것이다. 짜고 치는 고스톱이 중앙에만 있는 것이 아닌 모양이라는 비아냥을 들어서야 되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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