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종 / 시인
강소신문을 지향하는 경북매일신문에 내 칼럼이 경매 창간 18돌 축하(2008년 6월28일자)를 효시로 하여 올해 12월4일 현재 28개월 동안 내가 쓴 칼럼이 90편이 경매 애독자와 만났다. 90여회를 집필하는 동안 자료를 찾기 위하여 책을 펼쳐보거나 문장이 잘 안풀려 다시 고쳐쓴 적은 단 몇줄도 없었고 면발 뽑듯 1회로 끝냈다.

어떤 관심있는 독자들은 내 칼럼의 내용이 다양한 잡학의 전시장임을 보고 필자의 잡학실력에 압도된 이도 있고 날카로운 좌파비판을 더러 대하고 극우라고 나를 낙인찍는 이도 있겠지만 나는 우도 좌도 아닌 철저한 국가수호주의자일 뿐이다. `극우`란 말은 `빨갱이`란 말을 함부로 사용하지 말아야 하듯 `극우`란 말도 지극히 가려써야 한다.

극우란 나치 독일의 히틀러를 지칭하는 말이기 때문에 현재 한국에 극우란 한 명도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칼럼을 적는 목적은 법과 질서와 인정이 살아있는 밝은 사회를 이룩하기 위해서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머리가 대단히 좋다. 머리가 좋은 것은 사실이지만 인간성이 좋은 사람이 아주 희귀하다. 살기 좋은 사회란 머리좋은 사람보다 인간성이 좋은 사람이 많은 사회다.

이미 머리는 좋은 것이니 여기다 좋은 인간성을 가미하면 금상첨화가 될 것 같다. 인간성이 좋은 단정하고 아담한 사람이 되려면 늘 반성하는 일기를 적는것이 단아한 인격자가 되는 길이 될 것 같다. 필자는 20세부터 간략하게나마 일기를 적어오고 있다. 아이들이 태어난 시간을 확실히 몰라 해당 날짜의 일기를 보았더니 아이들이 태어난 시간이 분명히 적혀 있어 일기장의 덕을 본 적이 있다.

10년전부터는 문장으로 적지 않고 그 날 있었던 주요사실을 간단히 요목별로 적고 있어 기록에 대해 전혀 부담을 느끼지 않는다. 일기를 적는게 그렇게 인격향상에 큰 구실을 한다면 연산군은 방대한 `연산군 일기`를 남겼으면서도 우리 역사상 최악의 폭군이 됐느냐고 묻는 사람도 있을 수 있겠다. `연산군일기`는 연산군이 직접 쓴 것이 아니고 사관(史官)이 연산군도 모르게 기록한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엔 폐위당한 임금의 실록은 실록이라 하지 않고 일기라고 한다. 조선왕조실록엔 `연산군일기`와 `광해군일기`가 있다. 세칭 일류대학 국문학과 교수가 고전문학선집을 엮으면서 `연산군일기`를 일기로 분류하여 고전전집에 포함한 넌센스도 있었다. 실록과 일기를 혼동하여 생긴 웃지못할 일이었다. 연산군은 방탕한 기질이 못말릴 정도로 막강했지만 시정(詩情)도 철철 넘치게 과잉이었지만 워낙 폭군이라 연산군의 시는 쓰레기 취급을 받고 있다. 시를 잘 짓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람됨이 시보다 더 소중한 것이다. 연산군의 시 뿐만 아니라 기묘사화를 일으킨 장본인인 홍경주도 걸출한 시객(詩客)이었지만 `주초위왕(走肖爲王)`을 조작하여 조광조 선생을 해코지한 소인이기 때문에 그의 명시(名詩)도 역사의 쓰레기통에 사장이 되었다. 2차대전을 일으킨 나치 독일의 히틀러는 유대인 6백만 명을 가스로 학살한 살인마이기 때문에 피카소를 앞지르는 히틀러의 명화(名畵)는 아예 그림 취급조차 않는다. 유대인 6백만 명을 죽여 그 사체에서 얻은 유지(油脂)로 세수비누 6백만장을 만든 순악질이었다.

시나 그림같은 예술은 고된 인생살이의 윤활유다. 사람이 되지 못한 망나니가 예술적 기능이 조금 뛰어난다고 대단할 수는 없다. 빼어난 예술가가 되기전에 평범한 인격이라도 갖추기 위해 젖먹던 힘까지 쏟아 부어야 할 것이다.

연산군과 히틀러는 나라와 시대는 다르지만 둘 사이엔 우연의 일치겠지만 중요한 일치점, 공통분모가 존재한다. 성장기에 둘 다 모정이 결핍됐다는 사실이다. 연산군의 생모 윤비는 투기가 심하다고 폐비되어 사약을 마시고 말았다. 성장과정에 어머니의 사랑에 깊은 의문을 품고 자란 연산군은 임사홍의 피묻은 어머니 저고리를 받아 들고 생모의 비참한 최후를 알게 되어 피비린내 나는 살륙극이 점화됐고 연산군은 역사상 확고부동한 폭군이 되고 폐위에 이르게 됐다.

히틀러의 어머니는 어린 히틀러를 따돌리고 유대인 고리 대금자와 불륜을 즐겨 어린 히틀러의 어린 가슴에 유대인 증오의 불씨를 심어주어 6백만의 유대인이 6백만장의 비누로 둔갑하게 됐다. 어린 자녀에게 증오의 싹을 심는 부모가 되지 않기 위해 어머니 뿐 아니라 아버지도 단아한 삶을 살아야 한다. 이 세상엔 원인없는 결과는 결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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