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류 추적은 2천년전 기억 끄집어 내는 일”
기억 더듬으며 길나서

경북매일신문 창간 20주년 특별기획 `연오랑 세오녀 원류 추적`은 쉽지 않은 작업들이었다. 실체가 있는 듯 하지만 손에 잡히지 않는다. 국내현실도 그렇지만 신화의 무대가 됐던 이즈모시에서도 마찬가지다. 경북매일신문이 연오랑세오녀 신화를 추적하기 위해 지역의 역사학자 등 전문가를 중심으로 구성한 조사단이 지난 5월 이즈모시를 방문한데 이어 일반인들을 중심으로 다시 한번 방문단을 꾸렸다. 있는 듯 없는 듯 한 연오랑세오녀 신화, 10월말 떠난 방문단 가운데 이상모 (사)도시전략연구소장이 그려내는 신화의 무대 이즈모시 방문기를 4회에 걸쳐 연재한다.

<편집자주>

글 싣는 순서
신화의 무대 日 이즈모시 방문기

<1> 해와 달의 행로를 따라

고향의 이미지는 늘 느티나무와 함께 한다. 느티나무는 목격자이고, 기억의 저장소다. 공동체를 묶어주는 거멀못이다. 앞날이 마치 안개 속처럼 희미할 때, 우리는 켜켜이 쌓여 있는 기억 속에서 길을 찾는다. 도시공동체의 삶이 뿌리에서 흔들릴 때, 도시는 저마다 살 길을 찾아 기억의 창고를 더듬었다. 도시의 이미지를 바꾸고 강력한 브랜드를 만들기 위해 대형문화시설을 짓거나 큰 행사를 앞 다투어 벌여 보지만 `르네상스`가 성공하기란 쉽지 않다. 느티나무를 베어내고 `현대식 문화회관`을 짓는 것으로는 `영혼이 살아 있는 도시`를 만들지 못하기 때문이다. 기억이 도시 재생의 문화전략이 되기 위해서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꿰뚫는 의미망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시민의 삶과 연결되고, 미래로 나아갈 수 있는 에너지를 끊임없이 공급할 수 있는 기억이 아니고서는 그저 `박제` 하나 늘어날 뿐이다.

경북매일신문 창간 20주년 특별기획 `연오랑 세오녀의 원류추적`은 약 2천여 년 전의 기억을 끄집어내는 일이다. 부부가 일본으로 간 뒤, 신라의 해와 달이 빛을 잃었고, 세오녀가 짠 비단으로 제사를 지내고서야 빛을 찾았다는 짧은 이야기는 철강도시에서 첨단과학도시로 거듭나려는 포항에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 기억은 마치 안개 같은 것이다. 분명히 존재하지만 손에 잡히지는 않는 것. 2010년 10월29일 우리는 안개를 더듬어 길을 나섰다.

옛 길은 바다에 있었다. 바다에서는 육지보다 더 길이 복잡하다.

해류는 바닷길을 근본적으로 규정한다. 필리핀 북쪽에서 동북방향으로 흐르는 쿠로시오(黑潮)는 대마도를 사이에 두고 물길이 나뉘어 동쪽 물길은 일본의 연안을 따라 흐르고 서쪽 물길은 한반도를 따라 북상하다가 한반도의 허리부분에서 연해주에서 내려온 리만 한류와 만나 울릉도 부근으로 동진한다. 그리고 다시 일본의 혼슈 중부인 노토(能登)반도의 외해에서 난류와 합류한다. 울릉도와 독도가 해양문화에서 전략적 위치를 지니는 것은 바로 바닷길의 요충에 있는 까닭이다.

한반도 남해안의 조류 또한 바닷길에 심대한 영향을 미친다. 밀물 때는 남서쪽으로, 썰물 때는 북동쪽으로 흐른다. 동해는 바람의 영향이 심하다. 겨울에는 북서풍이 오뉴월에는 남동풍이 분다. 부산이나 울산, 포항에서 출발한 세력들이 혼슈(本州) 남부 시마네 현의 이즈모를 중심으로 남북 해안에 걸쳐 도착하는 것도, 삼척, 동해에서 출발한 세력들이 주로 혼슈 중부의 후꾸이(福井) 현 중간에 있는 쓰루가(敦賀)나 이시가와(石川)현의 노토반도 등에 도착하는 것도 해류와 바람이 만들어낸 바닷길 때문이다. 연오랑과 세오녀도 북서 계절풍을 타고 험한 파도와 싸운 뒤 왜국(倭國) 이즈모(出雲)에 닿았을 것이다.

이즈모로 가는 길은 지금도 순탄치 않다. 김해공항에서 비행기로 오사카 간사이(關西)공항에 내리고, 그곳에서 다시 쥬고쿠(中國)고속도로를 자동차로 4시간 반이나 달려야 이를 수 있는 곳이다. 새벽 일찍 간사이공항에서 출발한 우리 일행은 12시가 다 되어 갈 무렵에야 요나고(米子)와 마쓰에(松江)의 교차지점에 닿았다. 독도 영유권에 대해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지역이다. 1600년대 이곳 상인들은 울릉도를 가지고 싶었다. 두 가문이 막부로부터 울릉도 도해면허를 얻었다. 울릉도에서 이들과 부딪히던 안용복은 일본으로 건너가 이들의 도해면허를 철회시켰다. 그러나 울릉도와 독도에 대한 이들의 욕심은 멈추지 않았다. 1905년 일본은 독도를 다케시마(竹島)로 이름 붙였다. 울릉도와 시마네현 사이에는 직통 정기항로도 개설되었으며 요나고 공항에서 한반도로 직통항공 노선도 있었다. 마쓰에(松江)에서 울릉도로 해저전선을 통한 통신선이 가설되었으며, 울릉도에 들어 온 일본인들은 도동에 신사를 세워 자신들의 구심을 만들었다. 울릉신사는 `이즈모타이샤`(出雲大社)의 신을 모셨다.

이상모· (사)도시전략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