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종시인
고등학교 졸업사진 값을 숙부님께 애소하여 받아내어 졸업사진은 사지 않고 백수사(白水社)에서 발행한 3권으로 된 `한국단편문학전집`을 과감하게 샀다. 사변즉후 출판사정이 나빠 책 같은 책을 볼 수 없었지만 백수사에서 낸 단편소설은 1작가 1편을 원칙으로 하여 작품을 엄선해 실었고 오자하 한 자도 없는 유사 이래 완벽한 전집이었다. 한국단편 전집엔 현진건, 김동인 선생 등 주요작가의 단편소설의 백미가 실려 있어 마음먹고 낸 문학양서였다. 단편소설 전집에는 여류소설가 강정애 여사의 중편소설 `지하촌`이 실려 있어 분량이 제법 되었지만 선천성 장애자인 칠성이의 비참한 운명에서 유복자인 내 처지가 겹쳐져 감동을 꽤나 받았다. 뒤에 알았지만 강경애 여사는 가마가 둘인 쌍가마로, 문학소녀였다. 십대후반에 야간의 양주동 문학강연회에 참석했다가 서로 눈이 맞아 밤길을 동행했고 급기야 서울 당주동에서 동거에 들어갔다. 양주동과의 동거는 오래가지 못했고 강경애는 만주로 진출해 활발한 활동을 펼쳤는데 여류답지 않게 냉엄한 눈으로 사회를 심층 관찰해 사실적인 강도 높은 작품을 발표했다. `인간문제``소금` 등은 성공한 작품으로 꼽힌다. 강경애는 어려서나 어른이 되어서나 가정생활이 평탄하지 못했다. 쌍가마인 강경애는 머리에 가마가 둘 있으면 시집을 두 번 간다는 속설 그대로 양주동과 헤어진 후 당시 만주에서 코뮤니스트 남편과 동거를 했다. 강경애의 남편은 온건한 코뮤니스트가 아니라 극단적인 코뮤니스트였던 것 같다. 1920년 10월21일부터 26일까지 일본군 1개 연대를 전멸시킨 청산리 전투의 신화를 이룩한 북로군정서 김좌진 장군을 암살한 자가 바로 강경애의 남편이었다. 늘 군자금 마련에 시달렸던 김좌진 장군은 거액의 군자금을 가져와서 면회를 요청하는 청년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흔쾌히 만났다가 흉한의 직격탄을 맞고 독립군대장은 힘없이 쓰러졌다. 김좌진 장군을 암살한 것은 왜적이 아니라 동족인 코뮤니스트의 손에 죽고 말았다. 입만 열면 친일파를 욕하는 좌파들이 항일전선의 거장을 결단낸 것이다. 그 뒤 강경애의 공산당 남편은 독립군에게 붙납혀 총상을 당하고 죄 값을 치렀다. 해방 후 김일성은 김두하네게 군도와 인민군 소장계급장을 주었지만 아버지 김좌진 장군을 죽인 것이 바로 공산당이었음을 수도청장 장택상이 알려줘 그 뒤로 김두한은 반공전선의 맹장으로 눈부신 활약을 하여 원통하게 죽은 아버지 김좌진 장군의 영혼을 위무했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참여정부 때 강경애는 10월달에 `이달의 문화인물`로 선정돼 역사의 아픈 상처를 도지게 했다. 청산리 독립전쟁의 신화를 이룩한 김좌진 장군을 두 번 죽인 만행이요 공산당의 민족반역행위를 합리화시키는 폭거로서 이런 행정은 정치가 아니라 정신이상자의 발호로 밖에 볼 수 없다. 말만 하면 역사 바로 세우기를 염불처럼 외는 자칭 진보파들이 하는 일마다 어깃장을 쏟아 놓았다. 올해 들어 청산리 독립전쟁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행사가 잇달아 진짜 역사 바로 세우기가 시작되는 것 같아 우선 반갑다. 요사이도 `이달의 문화인물`이 선정되는 지 알 수 없지만 국가가 하는 일이 양식있는 국민들에게 수준이하의 장난질로 비쳐지면 안될 것이다. 양주동은 강경애와 동거를 끝내고 `별후`-`헤어진 다음`이란 시를 지어 마음의 흔적을 지우려고 했었다. 김좌진 장군의 `청산리 대첩`은 세월이 흐를수록 불후의 명작이 되어가고 있다. 생각 같으면 강경애 여사의 `이달의 문화인물`은 지금이라도 취소가 되어야 역사의 순리일 것 같다. 코뮤니스트의 아내가 무슨 죄냐고 내게 묻는다면 나도 요런 세상 사느라 골치가 지근거려 `에라, 모르겠다`라고 내뱉고 싶다.
저작권자 © 경북매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