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장 마늘 찌났다.(찌어 놓았다). 필요하면 가져가고 안 그라만 이웃들 나나(나줘) 주께.”

엄마의 전화 목소리. 김장철이 한참이나 남았는데 웬 김장 타령인가 싶지만 나는 그 맘을 안다. 차례 지낸다는 핑계로 추석에 못 만난 딸년에게 엄마는 미끼를 툭 던져 보는 것이다. 엄마 식 표현대로 살림에 `게실러빠진` 나는 그 실용적인 미끼를 덥석 물 수밖에.

“알았어요, 엄마. 박서방 하고 오후에 잠깐 들를게요. 마늘 딴 사람 주지마.”

엄마식 자식 사랑법에 찬물을 끼얹고 싶지 않아 나는 짐짓 마늘이 아쉬운 척한다. 당신 손수 사서 까고 찧은 마늘이 엄마집 냉동실에서 기다린다는 사실만으로도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팔순 엄마에겐 아직도 손이 가야할 막내딸년이 있는 것이다. 그런 엄마에게 나는 효녀는 못 된다. 아쉬운 게 없으니 엄마에게 먼저 전화하는 경우도 거의 없다. 궁금한 엄마가 전화를 걸어오면 그제야 내가 무심했구나, 하고 반성을 하는 정도이다. 오죽하면 엄마는 `니한테서는 전화 오는 기 더 걱정된다. 무슨 안 좋은 일 있나 싶어서. 무소식이 희소식이다 하는 말은 니를 두고 하는 말이다.` 이렇게 말씀하신다.

엄마에게 가는, 멀지도 않은 그 길을 선심 쓰듯 달려간다. `과부 할머니들의 사랑방`이라고 내가 부르는 엄마집 마당에 들어서자 윷놀이를 즐기던 할머니들이 우르르 자리를 피해준다. 친정집엔 엄마처럼 남편을 먼저 보낸 할머니들이 하루걸러 진을 친다. 주로 십 원짜리 윷놀이를 하는데 할머니들만의 노하우로 만든 싸리나무 윷가락은 좀 과장하자면 던졌다 하면 모나 윷이다. 엄마의 성당 동료들이기도 한 할머니들은 연령대도 다양한데 질리지도 않는지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엄마네 사랑방을 찾는다.

이웃을 맞이하는 것도 피곤할 때가 있는데 그때 엄마는 이불집으로 휴식 차 떠난단다. 그곳은 엄마만의 또 다른 사랑방이다. 자투리 천으로 베개와 쿠션과 조각보를 만들며 노동의 신성함을 즐긴단다. 폐품 활용한 엄마만의 작품 보따리를 들고 집으로 향하는 지하철에 오르면 원앙금침을 얻은 듯 충만해진단다. 살뜰한 엄마의 작품들은 자식들이나 이웃들에게 좋은 선물이 된다.

내 기억 속의 엄마는 병원 입원은커녕 몸져누운 적조차 없었다. 언제나 강인했다. 약한 몫은 차라리 아버지 차지였다. 지병을 달고 살았던 아버지를 대신하자면 엄마는 더 강해지고 더 자식들을 챙길 수밖에 없었으리라. `호미도 날이지만 낫과 같이 잘 들 까닭이 없고, 아버지도 어버이시지만 어머니 같이 사랑하실 이 없다`는 사모곡은 딱 우리엄마를 두고 한 노래였다. 그런 엄마도 이제 몰라보게 쇠약해졌다. 그건 이번에 알게 되었다. 오랜만에 엄마와 집 앞 방죽에 올랐다. 출렁다리를 건너 동촌 유원지까지 가서 저녁을 먹고 올 참이었다. 사위와 손자의 호위를 받으며 딸과 손잡고 걷는 것에 엄마는 꽤 만족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얼마 가지 못해 숨이 차고 무릎이 시큰거린다고 했다. 엄청난 충격이었다. 언제까지나 다부지고 강한 엄마일줄 알았는데 세월 이기는 장사 없었던 것이다. 팔순 노구의 엄마를 철없게도 나는 여전히 젊은 엄마, 강한 엄마로 남겨두고 싶었던 거다.

엄마의 정성이 담긴 마늘 보따리를 안고 귀갓길에 오른다. 골목에 서서 우리차가 멀어지도록 애처로이 서 있는 엄마. 그 모습 보기 힘들어 나는 창을 열고 냅다 소리를 지른다.

“엄마, 빨리 들어가. 그래야 내 맘이 편하다고!”

대답 대신 괜찮다는 엄마의 손사래만 차창 넘어 아롱진다. 매운 생을 돌아온 엄마 같은 마늘 냄새가 차안에 진동한다. 맵싸한 눈물이 자꾸 맺힌다. 어스름 풍경 속, 대추나무 아래서 엄마는 그렇게 한 점 소실점으로 멀어져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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