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이 가까워온다. 짬날 때마다 명절맞이 집안 청소를 해왔다. 아닌 게 아니라 이번 차례는 우리집에서 지낸다. 제사나 차례에 대한 부담을 느끼는 큰형님의 제안으로 삼 년마다 한 번씩, 추석은 나머지 형제들 집에서 지내기로 한 것이다. 여자로서 형님의 그런 심정을 백 번 이해한다. 아직까지 명절은 여성들에게(특히 며느리에게) 좀 더 가혹하다.

진심이 사라진 차례 상, 의무만 남은 식구들은 제수(祭需) 높이만큼의 마음 부담을 느낀다. 누군가 이건 아니야, 라고 외칠 용기가 없기 때문에 저마다 가면 하나씩을 쓰고 조상 앞에 엎딜 뿐이다. 명절이 고달픈 건 육체적 노동 때문이 아니라 심리적 불온을 조장하는 저 명절 지내기 방식의 여러 구조적 모순 때문이다. 모순을 느끼는 그 누구도 쉽게 답을 내지 못하는.

어쨌든 명절 준비 대청소는 주방에서 시작해 마루를 거쳐 드디어 책방까지 왔다. 엉망진창인 책꽂이를 보니 조상들 차례 준비가 아니라 책 귀신부터 먼저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버리기 좋아하는 나는 신이 나서 불필요한 책을 빼내서 묶는다. 아무리 과감하게 떠나보내도 쉽게 버리지 못하는 책이 나오기 마련인데, 그 중 하나가 `아웃사이더`(콜린 윌슨, 범우사)이다. 책방 정리를 할 때마다 버려야 할 책과 남겨야 할 책 사이에서 고민하는 경우가 있는데, 아직까지 이 책은 단 한 번도 그 경계에 내몰린 적조차 없다. 그만큼 아끼는 책이다.

내가 가진 `아웃사이더`는 1989년 판이다. 나는 이 책이 내 손에 들어온 때의 풍경을 또렷이 기억한다. 변변한 애인도, 뚜렷한 직업도 없던 그 막막한 가을(아마는 추석 무렵이었을 게다) 시를 배우러 가던 버스정류장 좌판에서 콜린 윌슨의 아웃사이더를 발견했다. 그 책에 대한 어떤 정보도 갖지 않은 채였다. 비교적 새 책이었는데, 정가 사천 원인 것을 단돈 천원에 팔고 있었다. 책 제목 `아웃사이더`에서 느꼈듯, 패배자나 열외자를 위한 위안서 쯤으로 생각하고 냉큼 집었던 게 틀림없다.

하지만 첫 장을 펼쳤을 때 그런 내 생각을 거둬야했다. 앙리 바르뷔스의 소설 `지옥`을 언급하는 콜린 윌슨은 아웃사이더야말로 철인(哲人)임을 강변했다. 콜린 윌슨이 정의한 아웃사이더는 주류에 끼지 못하는 주변인이 아니라 대중 다수로부터 스스로를 구별하는 우뚝 선 자였던 것이다. 철저하게 자신의 고독을 응시할 줄 아는 사람, 그러다가 끝내 신이 되는 경지에 이르는 사람만이 콜린 윌슨의 아웃사이더 범주에 들어 갈 수 있어 보였다. 단순한 약자나 소수자를 넘어선 깊은 파장과 울림을 동반하는 부류가 아웃사이더였던 것이다.

콜린 윌슨은 가난 때문에 정규 학교를 거의 다니지 못했다. 독학으로 쌓아올린 문학과 철학에 대한 지식으로 자신 만의 비평 영역을 가다듬었다. 스물 넷, 인생을 알기엔 너무 빠른 나이였지만 그에겐 그것이 걸림돌이 되지는 않았다. 당시 유행하던 실존철학의 인물들을 그토록 실감나게 자신만의 철학으로 가공한 사람은 흔치 않았다.

`나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없는 것 같다. 나는 너무 깊게, 그러면서도 너무 많이 본다.` (14쪽) - 콜린 윌슨은 아웃사이더를 정의하기 위해 이처럼 앙리 바르뷔스의 `지옥`의 일부분을 인용했다. 책을 펼칠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누가 뭐래도 콜린 윌슨의 아웃사이더는 `너무 깊이, 너무 많이 보는 자`다. 그가 언급한 수많은 문학작품의 등장인물도 현실의 예술가들도 모두가 사물이나 대상을 너무 깊이 너무 많이 본 자들이다. 예를 들자면 이방인의 뫼르소도 구토의 로캉뎅도 철학자 니체도, 화가 고흐도 단순한 소외자가 아니라 진정한 아웃사이더였다.

사회적 금기가 도덕이란 이름으로 포장된 채 개인적 가치와 상충할 때, 콜린 윌슨의 아웃사이더는 한줄기 빛처럼 그렇게 다가왔다. 그나저나 너무 깊이, 너무 많이 보는 자 있어서, 여성들의 명절 증후군 하소연을 콜린 윌슨적 시각으로 봐주었으면 좋겠다. 명절맞이 대청소는 짧고, 진정한 아웃사이더의 길은 멀기만 하다.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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