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현명 / 시인
클립은 종이에 상처를 내지 않고 묶을 때 이용되는 세상에서 가장 간단한 발명품이다. 그런데 이런 클립의 고유한 사용처 외에도 나는 클립이 다양하게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최근 알게 되었다. 이것은 기발한 상상력이며 잊고 있었던 놀라운 사실들이다. 사람들은 때로 책을 읽는 대상으로 쓰지 않고 뜨거운 냄비의 받침으로 사용하기도 하는 것이다. 닥치는 대로 생각나는 대로 쓰임새가 변하는 물건들은 그리 흔하지 않다. 더욱이 클립만큼 다양하기도 어려울 것인데 이놈은 참으로 시적이 아니겠는가? 자기가 가진 의미가 무궁무진하다니 자신도 들어보면 깜짝 놀랄 일이다.

천정에 늘어뜨려 발을 만들어 놓은 것이 가장 기발했다. 외에 나는 CD플레이어가 닫혀서 열리지 않으면 비상구멍에 클립을 펴서 꾹 눌러 연적이 있다. 아예 그렇게 하라고 설명서에 씌어있기도 하다. 그와 마찬가지로 전자기기의 리셋 키들은 모두 같은 방법으로 클립을 펴서 한쪽 끝으로 누르면 된다.

또 편지를 개봉할 때 클립을 펴서 한쪽에 구멍을 낸 뒤 집어넣어서 칼처럼 사용해서 쭉 찢어 열기도 한다. 책갈피로도 사용하고 작은 틈에 낀 것을 후벼 파내기도 한다. 물론 손톱 밑에 때 같은 것을 파내는데도 사용될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더 우아한 일에 쓰일 수 있도록 하는 게 현대적 발명품에 대한 예의는 아닐까. 전선줄을 한데 묶어 고정시키고 철사대용으로 사용하며 물건을 구별해서 표시할 때도 사용한다.

어린이들의 장난감이 만들어지는데 없어서는 안 될 것이 클립인데 물고기모양을 만들고 입에다가 클립을 끼운 뒤 자석을 막대에 달아서 물고기 낚시 놀이를 할 수 있다. 나는 아들이 어릴 때 이런 것을 만들어 같이 놀기도 했다. 또 오뚝이를 만들 때 무게중심추로 사용하든가 아니면 종이비행기를 더 멀리 날리기 위해 앞뒤나 중간에다 꽂아서 균형추를 만들기도 했다.

모기향을 피울 때 받침이 사라지면 클립을 몇 개 연결해서 받침을 만들어 사용하기도 하고 비슷하게 촛대를 만들어 대용으로 하기도 하고, 메뚜기를 잡아 꿸 때 혹은 어머니가 고기를 말릴 때 이것 사용해보시라고 권하기도 했다.

열쇠를 잃어버렸거나 열쇠 없는 문이 잠겼을 때 이걸로 넣어 열기도 하고 찬장 가로대를 받쳐주는 작은 쐐기가 빠져서 도망가 버리면 이걸 구부려 압정을 박아 대용하기도 했다.

아주 오래전 리더스 다이제스트라는 책을 읽다가보니 클립으로 고전미술부터 현대미술까지 모든 조각 작품들 만들어 소개하는 글을 만나기도 했다. 그는 클립을 펴서 이리저리 구부리며 사람 얼굴 윤곽을 만들기도 하고 여러 개를 겹쳐 연결해 놀라운 모양을 만들기도 했다. 그건 하나의 예술의 경지에 도달한 사람의 글이었다. 나도 따라해 볼까 몇 번 하다가 포기했지만 무척 재미있는 소일꺼리다 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이처럼 사소한 것에 날개를 달아주는 일, 그것이 예술이며 일상을 진부하지 않게 새롭게 경험하게 하는 일이다. 시를 읽고 시를 쓰고 향유하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로 세상의 사소하고 보잘 것 없는 것들을 따뜻한 시의 눈으로 보아 새롭게 날개를 달아주고 거기에서 빛을 얻어낸다. 클립에서 현대미술 작품을 얻어내듯 새로운 `아이디어와 에너지- 삶의 진실과 의미`를 얻어내는 것이다. 이런 일이란 세상에 얼마든지 있다. 요즘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는 아이폰을 만든 스티브 잡스는 “생각이 막힐 때마다 시를 읽으면 아이디어가 샘 솟는다”고 했다. 그가 만든 애플컴퓨터의 GUI-구이(graphical user interface: 컴퓨터 그래픽 기능을 사용하는 컴퓨터끼리의 통신규약)는 IBM 컴퓨터의 윈도우즈에도 영향을 주었으며 현재 인터넷을 사람들이 편리하게 사용하게 하는 바탕이기도 하다. 구이가 없다면 지금 인터넷이란 상상 할 수도 없고 옛날 전화통신에서 파일을 주고받고 글을 교환하는 수준에 그대로 머물러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상상력이 모두 클립을 구부리는 그런 종류의 상상력에서 나왔다니 놀라울 것이다. 놀라움을 조금이나마 느껴보게 당장 종이 한 장을 준비하자. 그리고 당신이 클립의 고유의 용도 외에 사용하고 있는 내용을 하나 둘 적어보자. 알고 보면 당신도 스티브 잡스만큼 상상력이 뛰어나다. 만약 클립의 용도가 무려 30개가 넘는다면 당신의 상상력은 이미 스티브 잡스보다 더 뛰어나다고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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