깃발 나부끼는 세상이다. 집 나서자말자 가장 먼저 만나는 것이 각종 깃발일 정도이다. 대로변 사거리, 전봇대나 가로등 기둥 사이를 가로지르는 형형색색의 플래카드들. 볼 살 확 빼드립니다 - 경락마사지를 권유하는 문구부터, 뼈다귀 해장국집 신장개업 안내를 지나, 스포츠 댄스 회원 모집에 이르기까지 펄럭대는 깃발은 현대인들의 다양한 삶의 방식을 그대로 보여준다. 과연 제멋대로 휘적대는 저 깃발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몇이나 될까?

다 가진듯한 유명 여성 산악인도 그 깃발 끈에서 자유롭지 못한가 보다. 붉은 깃발 하나가 영웅시된 그 산악인의 발목을 잡아당기고 있으니. 8000m이상 히말라야 14개 봉우리를 거침없이 정복해 국민적 희망으로 떠오른 그미를 둘러싼 의문이 공중파 방송을 탔다. 14좌 중 적어도 칸첸중가의 정상은 밟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의혹이었다. 그 몇 가지 증거 중에 하나가 가지고 간 깃발이 정상보다 백여m 아래 돌쩌귀로 네 모서리가 가지런히 눌려 있었다는 것. 그 깃발은 등산 당사자가 중간에 잃어버렸다고 했는데, 정작 정상 정복 증거 사진 속에서는 가슴팍에 고스란히 품어져 있었다.

방송을 보면서 내 관심은 등정 사실 여부가 아니었다. 정확한 내용은 전문가들의 판단과 당사자들의 양심에 의해 판가름 날 것이다. 문외한인 내겐 그 멀고 힘겨운 고산 등반 중에 깃발을 몇 개씩이나 품고 간다는 사실에 연민과 충격을 동시에 느꼈다. 민족주의 이념이 팽배한 우리네 정서이니 태극기 정도는 애교로 봐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한데 품고 간 깃발은 태극기, 후원업체, 방송사, 대학 모교 등 네 개나 되었다.

때에 따라 지녀야 할 깃발이 더 늘어날 수도 있겠다 싶었다. 고산 등반에 관한 뉴스를 검색해보았다. 도움 주는 이가 늘어날 경우 품고 가는 깃발도 더해지는 것은 당연했다. 어떤 남성 산악인의 경우 로고 박힌 후원사들의 깃발 무게만 해도 장난이 아니라고 토로하고 있었다. 정상에서 깃발 하나하나씩을 꺼내 현장 인증 사진을 찍어줘야 할 것이다. 자신들의 등반을 도와준 후원업체들을 서운하게 할 수는 없으니. 그렇게 하는 것이 서로가 이기는 게임이고 인지상정처럼 되어 가고 있는 것 같다. 나무랄 수도 없다. 에베레스트처럼 고산 등반일 경우 엄청난 비용이 드는 게 사실이니까.

등산 업계 얘기만이 아니다. 자고로 우리는 깃발 너무 나부끼는 세상에 살고 있다. 깃발의 효용은 눈에 띄는 거다. 눈 가진 자들이여, 제발 이 깃발 한 번 봐 주오. 대중을 향해 소리 없는 아우성을 쳐대는 것이 깃발의 운명이다. 어쩌면 문자 이래로 가장 가엾고 비열한 선전도구로 진화해온 게 깃발인지도 모르겠다. 현대 사회는 인증 사회다. 툭 하면 뭘 증명하란다. 관공서 보고를 해도 증거를 원하니 깃발 내걸린 행사장 앞에서 사진을 떡하니 박아야 하고, 유명 인사의 강연회에서도 깃발을 내걸어야 그럴듯해 보인다.

깃발 천국 세상, 그토록 많은 깃발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실제로 나는 그들의 물리적 운명이 궁금한 적이 있었다. 전시회 카탈로그 작업을 하는 사진작가가 보여준 사진 한 장에서 그 궁금증이 풀리는 동시에 약간의 감동을 느꼈다. 염전 물막이용 보자기로 재탄생한 깃발에서 그 진정한 쓰임새를 발견한 것이다. 사진을 보는 순간 깃발이야말로 재활용될 때 더욱 빛난다는 생각이 들었다. 염전 물막이가 되거나 장바구니와 낙엽 담는 마대로 거듭나거나 양식장 로프로 가공되기도 한다. 그러고 보니 깃발은 펄럭일 때만 그 쓰임새가 최대인 것은 아니다. 재활용될 때 더 숭고한 밥벌이가 되기도 한다. 저 차고 넘치는 깃발의 시간들을 넘어서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순수는 간 데 없고, 깃발만 나부끼는 세상에서 나는 읊조린다. 사람들아, 깃발이 석탄광 정도라면 폐 깃발이야말로 노다지라고.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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