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보는 것보다 읽는 게 낫다. 이 말은 내게 유효할 때가 많다. 말하자면 영화를 작품으로만 보는 게 아니라 텍스트로 읽는다는 뜻이다. 영화가 한 권의 책과 마찬가지로 다가오는 것이다. 취향에 맞는 책을 만났을 때처럼, 영화관을 나설 때 눈 즐거운 것을 넘어, 맘 느꺼워져야 안심이 된다고나 할까. 인위적인 에피소드가 생략되어도 좋으니 좀 더 현실을 반영할 것, 과장된 휴머니즘이 아니어도 좋으니 솔직할 것, 큰 얘기보다는 내면의 울림이 배어나올 것 등등, 내 영화 취향은 책과 마찬가지로 현실 지향적이다.

이왕주의 책 `철학, 영화를 캐스팅하다`(효형출판, 2005) 역시 영화를 텍스트로 읽은 경우이다. 작가의 말을 빌리자면 영화와 사귄다는 건 `영화를 작품work이 아닌 텍스트text로 만난다는 것을 뜻한다. 롤랑 바르트는 작품과 텍스트를 구분했다. 작품에서는 오직 작가의 뜻을 읽어낼 뿐이지만, 텍스트에서는 우리가 뜻을 만들어낼 수 있다. 작품은 닫혀 있으나 텍스트는 열려 있다. 작품은 때로 고통을 안기지만 텍스트는 언제나 즐거움을 준다.` 라고 말하고 있다.

감독의 의도를 읽어야 하는 닫힌 `작품` 보다는 작가 맘대로 읽을 수 있는 열린 `텍스트`란 얼마나 매혹적인가. 고백하건대, 나는 이왕주 작가의 팬이다. 일개 팬인 독자의 취향을 작가는 알 리 없다. 하지만 아전인수 식으로 나는 영화를 읽는 그의 시선이 위에 열거한 내 열망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위안을 삼는다.

철학자인 이왕주 작가의 글을 알게 된 건 오래 전이었다. 어느 일간지에 작가는 칼럼을 연재 중이었다. 그의 글은 얼음 넣은 매실차처럼 시원한가 싶다가도, 때론 웅덩이에 버려진 낡은 슬리퍼처럼 애잔함이 묻어나기도 했다. 나중에 칼럼집이 책으로 나왔을 때 나는 주저 없이 샀다. `쾌락의 옹호`는 그리하여 내가 아끼는 책 중의 한 권이 되었다. 누구나 다 겪는 일상인데, 아무나 쓸 수 없는 발군의 필치로 매혹적인 에세이를 엮어냈던 것이다.

시종일관 그는 삶이란 최대한 호기심을 가지고 음미하는 것이라고 역설했다. 진흙탕에 빠지든, 영혼에 무거운 돌덩이가 얹히든, 누군가 죽비로 등짝을 후려치든, 생의 돌파구는 스스로 뚫는 것이라고 했다.

따지고 보면, 불쾌와 유쾌의 짐은 우리 생에 동등한 봇짐이 될 터이니 지고 부리는 일쯤이야 찾아서 즐기자고.

호기심 많던 나는 그 책 한 권에 매료되어 작가의 프로필만 보고 전화를 걸었다. 좋은 글 쓰는 작가들을 숱하게 책으로 만나왔지만 작가에게 전화를 건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인터넷이 발달하기 전이었으니, 메일을 보낸다든가 검색을 해서 정보를 얻는다는 건 생각지도 못했다. 작가는 연구실에서 전화를 받는다고 했다. `팬입니다.` 라는 내 고백에 작가는 더러 그런 전화가 온다고 담담히 대답했다. 답례로 자신이 발간한 모든 책을 보내주겠다고 했다. 주소를 불러달라는, 독자를 위한 작가의 배려를 나는 조심스레 사양했다. 팬이라면 작가의 모든 저서를 적극적으로 구매해줘야 한다는 게 당시 내 생각이기도 했지만, 실은 너무 당황스럽고 민망해서 주소조차 불러줄 용기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난 뒤 작가는 영화를 철학으로 풀어 쓴 책을 들고 나왔다. 서른 편에 가까운 영화평이 실려 있다는 건 내게 중요하지 않다. 진작에 작가가 생산해낸 모든 말들의 텍스트에 독자로서 매혹 당하는 중이었으므로. 어느 작가, 어느 철학자가 한 말보다 그가 쓴 말들은 밑줄 긋기 하기에 벅차다. 이를 테면 이런 식이다.

`글은 손으로 써야한다. 손은 단순히 글쓰기를 수행하는 신체의 일부를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머리를 굴리느라 휘어져 버리기 전에 솟구쳐 오르는 언어들을 다침 없이 드러내주는 글쓰기의 진정한 주체다. 손이 머리에 복종하고 만다면 글에는 반드시 어떤 억지가 끼어들기 시작한다. 그러나 머리가 손에 복종하면 가슴에서 솟구치는 언어를 지킬 수 있다. (298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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