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종시인
지금은 만나뵐 수 없는 전설이 되어버린 천재시인 노산 이은상 선생님과 초정 김상옥 선생님이 생전에 내게 하신 말씀이 생각난다.

노산 선생님은 시는 글을 짓는 게 아니라 새로운 말을 짓는 것이라고 깨우쳐 주셨다.

초정 선생님은 시인은 `말꼽냥이`라고 하셨다. 수전노가 돈을 지독하게 아끼듯이 시인은 시를 지을때 말을 최대한 아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사반세기 전 안동문인협회가 문예창작 강좌를 마련했는데 점촌의 시인, 필자를 일일 강사로 초청했다. 문단에 오른지 20년 만에 문학 특강 강사로 초대받아 내심 기뻤다.

강좌 시작 한 시간 전에 안동문화회관에 도착하니 참관인들이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렸다. 안동시는 문학수준이 점촌보다는 게임도 안되게 높은 것 같았다.

문경문인협회 제1회 문학강연회가 1979년에 있었는데 중앙문단의 거장 중진시인 문덕수 교수를 특강교수로 초빙했는데 일요일 오후가 되어 그런지 필자가 가로로 뛰고 모로 뛰어도 동원한 인원이 고작 40명이 채 못되어서 강사로 오신 문덕수 시인 교수님 보다 내가 더 낭패의 감을 느꼈었다. 몇년 뒤 안동문화회관의 참관인 대성황을 보니 나의 지난날이 더욱 부끄러웠다. 그날 운집한 관중들 줄에 끼었더니 그날 그때 그 장소엔 음악회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급하게 줄에서 빠져나와 문예강좌 장소를 물었더니 아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 발바닥에 땀이 젖게 층층 방방을 톺은 끝에 골방같이 좁고 으석하게 구석진 소공간에 9명의 청중이 강사인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날 수강생 9명은 단원 김홍도 선생의 서당 학동 9명과 우연의 일치겠지만 숫자가 딱 들어맞는다.

전날 밤에는 수강생이 고작 7명이었는데 점촌에서 문예 창작 강사님이 특별출연하게 됐다고 장장 2명이나 더 잠신 것이라 하니 실망스럽기 보다 고마웠다. 삼국사기를 펼쳐보면 사벌국(상주 소재)과 소문국(의성 소재)사이에 전쟁이 벌어졌는데 군사를 크게 일으킨 것이 30명(大發兵三十人)이란 기록이 있다. 옛날엔 국가간 전투 인원도 고작 30명 이었는데 시골시인 문학특강에 9명이 나왔다고 흠 될 것이 무었이겠는가.

양보다 질이 특히 문학에는 요하는 것이다. 그날 나는 문학인이 갖춰야 할 자산으로 일물일어(一物一語)의 경지, 정확한 언어구사를 위해서는 우리 한글 사전을 독파(讀破)할 것을 강조하고 한글 사전을 하루 한쪽만 읽으면 5년이 걸리면 사전 한 권을 읽을 수 있게 될 것이라 역설했다. 창작에 우리 고유의 말을 활용하면 내용도 더 실감이 나고 토속적인 맛과 멋이 더 날 것이라고 강조했다.

우리 고유어의 예를 들어 사전읽기의 동기유발을 촉발시켰다.

고유어 `되무시`는 한번 시집을 갔다와서 처녀행세를 하는 가짜 처녀요, `되깎이`란 한번 승려가 됐다가 파계 환속한 뒤 다시 삭발하고 승려가 된 중을 일컫는 말이다.

고어(古語)를 현대시에 잘만 끌어다 쓰면 양념효과가 크겠지만 잘못 쓰면 엉뚱한 뜻이 글을 망치게 됨을 유념해야 한다. 제법 유(有)짜 명(名)자한 중견시인이 `구름이 머물다`는 뜻을 `구름이 머흘레라`라고 적었는데 `머흘레라`는 `머문다`는 뜻이 아니라 `험상궂다`는 뜻이다. `새가 울어 대다`를 `새가 울어 예다`로 표기했는데 `새가 울어 예다`는 `새가 울며 날아간다`는 뜻이다. `예다`는 `간다`의 옛말이다. 휼륭한 시인·작가를 원하거든 한글사전과 평생 남매결연을 맺어야 할 것이다.

그날 9명의 문예강좌 수강 인사에 안과의사 최유근 수필작가가 시종일관 강사 김시종과 눈을 맞췄는데 그러고 나서 20년이 지나고 반갑게 최근 최유근 작가를 만났는데 그날 필자의 열강 덕분에 평생 난공불락이던 한글사전 독파를 달성하고 요사인 늘어난 어휘실력 덕분에 수필 창작이 한결 쉬워졌단다.

그렇다. 교육의 성과는 20년이 지나가야 비로소 성패가 드러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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