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아달라왕 4년(157) 포항에서 바위를 타고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의 왕이 됐다던 연오랑 세오녀 신화속의 지역이 바로 이즈모다. 이즈모시에도 우리의 연오랑 세오녀 신화와 비슷한 내용의`스사노 오노미고토`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고 일본에서 `꿈같은 신화의 무대`로 유명하다.

포항 영일만에서 일본열도 이즈모까지는 약 300㎞로 계절풍과 해류를 타면 며칠 안에 바로 도착할 수 있는 곳이라고 한다.`연오랑 세오녀 원류 추적` 조사단은 이 지역 주변에서 발굴된 고대 유적과 유물을 보면서 많은 유물이 한반도에서 건너왔다는 사실을 확인하면서 포항과 이즈모는 고대부터 오랜 교류를 해왔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의 이즈모 시는 2005년 3월 22일에 구 이즈모 시·히라타 시·히카와 군 다이샤 정·고료 정·다키 정·사다 정의 2시 4정이 합병된 통합시다. 특히 일본의 신도 사원 가운데 가장 오래된 이즈모 다이샤에는 1년 내내 참배객이 끊이지 않고 있다 한다.

조사단이 찾아간 유적 가운데 △야스기 와코박물관 △이즈모 가라카마 신사 △이즈모 다이샤 유적 △이즈모 현립 역사박물관 △마쓰에 야에가끼 신사 △운난 간바라 신사 내 수혈식 석실과 유물 등을 소개한다.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프롤로그
일본속에 숨쉬는 역사적 진실⑴
일본속에 숨쉬는 역사적 진실⑵
신화의 고향 이즈모의 유적들
에필로그

○야스기 와코(和鋼) 박물관

산인지방은 옛날부터 사철광(砂鐵鑛)이 유명한 지역으로 에도(江戶)시대(1603-1867)~메이지(明治)시대(1868-1912)에 걸쳐서 일본의 제철산업이 왕성했던 곳이다.

이 박물관에는 근대 제철산업에 사용된 유구와 재료 등을 재생하여 전시해 놓고 있다. 특히 천칭(天秤)풀무는 에도시대 초기에 발명하여 사용한 것을 재현해 놓고 있다. 1층 전시실 중앙에는 제철 유구인 점토제 화로를 중심으로 양쪽에 천칭풀무가 복원돼 있고, 비중선광법으로 사철을 채취하는 모습을 모형화한 지형이 함께 전시되어 있다. 이외에도 점토제 화로의 지하구조를 단면으로 보여주는 전시와 고전(高殿·제철조업 공간) 등을 축소한 모형을 갖춰놓고 있다. 유물로는 제철에 사용된 목탄원료, 생산품인 게라(화로 바닥의 쇳덩어리),옥강(玉鋼·고급품의 강철), 선철 등이 있다.

이즈모 제철산업은 일본열도 내 우수한 재질의 사철광과 고사기(古事記)와 일본서기에 등장한 스사노 오노미고토와 야마타노오로찌(머리와 꼬리가 8개 달린 뱀) 퇴치신화와 관련하여 역사와 전통을 자랑한다. 그것은 이즈모지역의 사철을 채취하는 과정에서 강을 붉게 물들이며 토사가 흘러가는 모습을 보고, 마치 스사 노가 야마타노오로찌를 퇴치하자 그 피가 강을 통하여 흘러가는 모습에서 신화를 탄생시켰다고 한다. 이때 야스기지역의 사람들이 사철을 건지는 모습을 보고, 도죠스쿠이(미꾸라지 잡기 춤)란 전통춤을 개발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즈모 제철산업은 천칭풀무와 점토제 화로를 사용한 타다라공법을 이용한 것이 특징이다. 문제는 타다라공법이 언제, 어떻게 발생했는지가 문제이다. 이것을 두고 연오랑 세오녀의 이름에서 열간단조와 냉간단조의 의미를 찾아서 관련짓고 있다. 그러한 관련성은 한국 삼국유사의 연오랑과 일본 고사기의 스사 노를 동일인물로 보았고, 그것을 토대로 야요이시대 제철기술은 연오랑, 스사노가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전수한 것으로 보았다. 한편으로는 수긍이 가지만, 와코박물관의 전시된 유물의 연대와 연오랑 세오녀, 스사노 신화의 등장 연대와의 차이점, 고고학적 증거의 불충분은 앞으로 연구과제이다.

○이즈모 가라카마 신사 유적

가라카마 신사는 이즈모시 북서쪽 당천정(唐川町) 字後野 408번지에 위치한다.

신사는 해발 457m 여복산(旅伏山) 상류 계곡에 있으며, 계곡에는 배의 앞부분 모양에 해당하는 큰 바위와 산 정상에는 돛을 편 형상의 바위가 있어서 야스카미수오미즈누노미고토(八束水臣津野命)가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건너올 때 타고 온 바위 배와 돛대로 전해지고 있다.

이즈미풍토기(風土記·733년)에 가라카마신사는 연희식신명장(延喜式神名帳·927년)에 `가라카마다이샤`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설립은 알 수 없지만 예로부터 전해져 오는 신사라고 한다. 사명(社名)인 가라카마는 조선에서 건너온 부(釜·가마솥)를 의미하는 것이다.

일본서기 제신(祭神)인 스사노 오노미고토(素盞鳴命)가 아들 신과 함께 신라에서 일본으로 건너오면서, 나무 심는 방법(植林法)과 제철문화를 함께 가져 온 것으로 보고 있다. 신사가 위치한 북산산계(北山山系)는 옛날부터 산동(産銅)지대여서 금굴(金堀)지명이나 자연동 타다라 흔적 등이 남아 있어 제철문화와 관련 있는 신사로 보고 있다.

운양지(雲陽誌·1717년)에는 스사노를 제사지내는데 늙은 노인(古)이 전하기를 스사노가 타고 온 평평한 바위(平岩)의 2間4方(4.5m)정도의 배가 있어서 바위 배(岩舟)라 하며, 바위 배의 곁에 연속해 둘레 2丈(7m) 남짓, 높이 6間(10.8m) 정도의 입암(立岩)이 있어서 범주석(帆柱石)이라고 하고, 신사의 입구에는 암혈(巖穴)이 있고, 신사에 이르는 통로가 된다고 한다.

하지만 이번 답사에서는 바위 배와 산 정상부에 있는 범주석만 보고 암혈 등은 확인하지 못했다. 범주석도 산 정상의 소위 세오녀 사당 곁에 있는 대형바위는 운양지의 기록과 차이가 있었다. 가라카마 신사의 바위 배와 범주석을 두고 연오랑 세오녀 신화와 직접적으로 연결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그러나 양국의 신화와 신사주변의 지형, 바위 배의 유래 등을 다른 각도에서 해석하고 연구한다면 한일고대사의 제철문화 루터를 조명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즈모 다이샤(出雲大社)유적

이즈모시 북서쪽, 야쿠모산에서 미산산으로 이어지는 능선 하단부에 있는 이즈모 다이샤는 고사기와 일본서기에 오쿠니 누시오카미(大國主大神·대국주대신)가 나라를 세울 때 큰 바위에 기둥을 세우고 거대한 궁전을 만들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 그의 할아버지는 스사노 오노미고토라고 한다.

이즈모 다이샤는 1744년 완성된 본전(本殿·국보)과 음력 10월이면 전국 8백만 신들이 모인다는 신락전(神殿), 한국의 금줄에 해당하는 길이 13.5m, 무게 5톤의 시메나와, 초기 궁사인 천가국조(千家國造)가 남긴 저택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2,000년도의 신사 내 발굴조사에서 본전에 해당하는 곳에서 3개의 기둥이 한 세트가 된 본전 기둥을 발견함으로써 초기 건물의 규모를 짐작하게 되었다. 이즈모 다이샤에는 해마다 전국에서 인연을 맺어주는 신들이 모여 회의를 하는 곳이란 의미에서 많은 사람이 찾아와서 참배를 한다.

신사와 연오랑 세오녀 관련 내용은 신라 때 연오랑과 동일인물로 거론되는 스사노 오노미고토가 일본으로 건너 와서 기거한 곳이란 설과 관련되어 있으나, 고고학적인 증거는 불충분하다.

○이즈모 현립 역사박물관

박물관은 2007년 3월에 국보인 고진다니유적 동검 358점과 중요문화재 가모이 와쿠라유적 동모 39점을 보유하면서 2007년 3월 개관하였다.

1층 전시실은 이즈모 타이샤(出雲大社) 경내에서 출토된 3개의 나무기둥을 하나로 묶어서 가마쿠라시대에 본전 기둥 1개로 사용한 유물이 수습되어 전시하고 있다. 그것을 토대로 10분의 1로 축소한 이즈모 타이샤 본전 모형도 만들었는데 건물규모와 계단 등이 어마어마하다.

그러나 역사박물관에서 연오랑 세오녀 신화와 연결할 것은 전시된 고진다니 유적과 가모이와쿠라 유적의 유물 및 다이샤 유물 정도이다.

○ 마쓰에 야에가끼 신사

고사기와 일본서기에 의하면 이곳에 모신 스사노 오노미꼬토는 초고대왕(肖古大王)으로 신라 증시무리(曾尸茂梨·소시모리)에서 점토 배를 타고 일본 이즈모에 왔다고 한다. 그 후 초고대왕은 이즈모 히가와강의 수하(須賀)에 야에가끼궁을 세우고 장남인 오쿠니 누시오카미(大國主大神·대국주대신)를 낳았으니 그가 훗날 천황가(天皇家)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신사는 본전과 보물관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보물관에는 스사노 오노미고토와 그의 부인 이나키 히메 미고토를 그린 13세기 벽화가 남아 있다. 특히 보물관에는 신사주변 연못을 정화할 때 수습한 대부완, 병, 고배대각 등 토기류를 보관하고 있는데 이 유물들은 기형이나 소성으로 보아서 통일신라기의` 유물과 흡사하다.

스사노와 그의 부인을 그린 13세기 벽화와 연못에서 출토되었다는 통일신라기의 토기류를 연오랑 세오녀 신화와 직접적으로 연결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하지만 통일신라기에 들어와서 신라와 왜 사이에 서로 교류가 있었던 것은 확실하다.

○ 운난 간바라(神原)신사내 수혈식(竪穴式) 석실과 유물

소화 47년(1972) 히이가와강의 지류인 적천(赤川) 확장공사때 경초 3년(239)이란 명문이 든 명경(銘鏡·거울)이 수습되면서 간바라 신사내 석실 유물의 발굴조사가 이뤄졌다.

일본기록에 경초 3년은 사마대국(邪馬大國)의 여왕 비미호(卑彌呼)가 중국에 사신을 보내면서 동경 100장을 받아온 해이기도 하다.

간바라 신사의 고분은 1기로 윗면이 네모 반듯한 모양을 한 분구묘(墳丘墓)이다. 그 상면 중앙에 북동-남서향으로 자리 잡은 석실이 있다. 분구 규모는 29ⅹ25m, 높이 5m 이상의 대형 방분(方墳·봉분의 모양이 네모진 무덤)이며, 내부 석실은 판석을 이용하여 양장 벽을 안쪽으로 기울어지게 쌓아올리고, 상면에는 작은 판석 여러 매를 잇대어서 뚜껑을 한 전형적인 수혈식 석실이다. 석실 크기는 5.8ⅹ1ⅹ1.4m이며, 바닥은 점토를 깔고, 그 위에 길이 5.2m의 할죽형(割竹形) 목관(木棺)을 설치한 구조이다. 석실의 부수시설로는 배수구, 붉은색을 바른 토기 5점을 둔 장방형의 구덩이가 있다.

목관 내에서 삼각녹신수경(三角神獸鏡·삼각형 짐승 뿔이 달린 거울) 1점과 무기, 농공구 등 다량의 철제품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또 석실 천정석의 상면에서 제사용 뚜껑, 기대(器臺·그릇받침)의 토기파편 등이 출토되었다. 고분에서 나온 유구와 유물로 볼 때 일본 학자들은 고분시대 초기의 무덤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 유적은 고진다니, 가모이와쿠라 유적과 북서-남동쪽으로 일렬로 배열되어 있어서 관련성을 갖는 듯하다. 하지만 이 석실도 연오랑 세오녀 신화가 나온 후 약 80~100년 뒤에 조성된 것으로 신화와는 직접적인 관련성은 희박하다. 그러나 이곳에서 출토된 유물 가운데 철제품은 포항 원동, 흥해 옥성리의 목관과 목곽묘에서 출토되는 유물과 비교되는 것이 많아서 한반도의 제철기술이 전해지고, 일본에서는 이러한 고분을 조성할 때는 이미 상당한 제철기술이 축적되어 있었음을 시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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