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다닥, 할당된 영어 문항을 풀어 젖힌 아들 녀석, 문제집을 던지듯 밀쳐놓는다. 얼렁뚱땅 주어진 목표치를 해치우고 `개그 콘서트`를 쳐다보며 낄낄댄다. 세상 근심일랑 일찌감치 잊은 표정이다. 그래. 의무 방어전으로 해치우는 공부보다야 웃음 주는 개그 프로그램이 백 번 흥미 있지. 학원 도움 받지 않고 독학하려는 그 태도라도 높이 사야지, 하면서 풀어 놓은 문제집을 살펴본다. 어라차, 그럼 그렇지. 얼마 가지 않아 오답이 나온다. 살짝 문항지를 봤다. 녀석의 오답과 상관없이 제법 흥미 있는 내용이다. 행복해질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은 무엇인가, 라고 묻고 있다. 수 년 간의 연구를 통한, 현명한 사람들이라면 택해야 할 그 확실한 방법이 지문 안에 들어 있다.

어느 정치학자가 다국적 대학생들에게 각자 얼마나 행복한지 물었다. 그런 다음 그들의 삶에서 자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소유하는데 얼마나 근접해 있는지 조사했다. 그가 알아낸 바로는 덜 행복한 사람은 이미 가지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욕심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말하자면 자신의 월급이 인상되어도 더 행복해질 수 없단다. 언제나 더 큰 욕심이 우리 앞에 기다리고 있으니. 우리는 만족하는 대신에 더 많은 것을 바라는 사람일 뿐이다. 고로 욕망을 버려야 행복해진다. 이 단순명료한 명제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이것을 온전히 제 것으로 만들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오지선다의 선택항에도 눈길이 간다. 이를 테면 건강을 유지하는 것, 좋은 직업을 갖는 것, 많은 친구를 갖는 것, 목표를 달성하는 것, 욕심을 줄이는 것 중에서 행복한 방법이 무엇인지 고르란다. 텍스트 안에서 답을 고르지 않고, 평소 생각으로 답을 고를 수만 있다면 개인의 인생관에 따라 각 항목 모두가 정답이 될 수 있다. 예상은 했지만 아들녀석은 `목표를 달성하는 것`에다 답 표시를 해 놨다. 이건 뭐 독해 따로, 자신의 인생관에 따른 정답 따로 택했다고 위안이라도 삼아야 할 판이다.

열대야마저 겹쳐 잠 못 드는 이 여름밤, 원인은 무엇인가? 제 각기 다양한 답변이 나올 수 있겠지만 위 영어 지문대로라면 욕망을 덜어내지 못한 때문이다. 자녀가 공부 해주기를 바라고, 가장의 월급이 오르기를 기대하는 욕구는 끝내 만족 없는 번민이 되어 평범한 사람을 괴롭힌다. 그러니 위 지문 같은 학자는 역설하게 된다. 욕구를 버려야 행복이 온다고. 이럴 때 한 권의 시집이 위안이 될 수 있을까? 눈썰미 깊숙한 서숙희 시조시인의 `손이 작은 그 여자`(동학시인선, 2010)를 읽어 내린다. 내 안에 도사린 허욕의 실체를 점검하고, 조금씩이나마 그 무거운 덩어리를 덜어내려 애써본다.

번민은 궁극적으로 욕망이 낳은 똥이다. 빨라지고 다양해지는 세상의 행보에 동떨어지고 싶지 않은 욕망은 똬리를 틀다 마침내 밤에 돋는 상처의 달맞이꽃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상처 입은 영혼은 잠들지 않는다 / 새파란 칼날 위에 알몸의 생을 올려놓고 / 한 장씩 꽃잎을 피워 달빛을 베어 물`게 되는 것이다. 욕망의 거리에 내몰린 개별자는 그래도 곧추 직선을 꿈꾸며 스스로를 위무한다. `하루치의 밥을 위해 자존심도 유예`하고 `생존의 비린내 자욱하게 밴` 하루를 `구부리고 굴`려 고단함을 잠재워 보는 것이다. 제상에 오른 꼬챙이 꿴 조기를 보면서 `길 아니면 가지 말고 곧은 것만 좇으라시던` 말씀을 새겨보지만 그조차 `받잡아 따`르기가 어려운 건 내 안의 욕망덩이 때문이 아니던가.

`무우에는 우-하고 고여드는 것이 있다 / 낡고 해진 것들을 둥글게 껴안아/ 따스한 즙으로 젖는 겨울밤의 아랫목`을 발견하고, `사람과 사람의 일이 단추를 풀고 채우듯이 / 그렇듯이, 서툴지도 완강하지도 않다면 / 그렇듯 담담하고도 사소한 일`임을 안다면, 그깟 내 안의 허영 한 덩이를 덜어낼 수 있지 않을까. 그리하여 팽팽하게 둥글던 보름달 보내고 열이레 쯤 되는 달밤이 오면 `그대와 나 사이에 놓인 아득한 은유 같은` `기우는 저 쓸쓸한 이치를` 수긍하게 되리라. 행복을 갉아먹는 저 욕망 덩어리가 쉬 깨지지는 않겠지만 그럴수록 그 찌꺼기, 시 한 편에 곱게 씻어내 보는 것이다.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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