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5월13일. `포항 흥해 중성리 신라비(이하 중성리비)`가 세상밖으로 나온 것은 몇가지 우연이 겹친 `행운`이었다.

최초 발견자 김헌도씨가 중성리비를 처음 자신의 집에 옮겨온 이유는 화분 받침대가 필요해서였다.

그러던 것이 마침 그날 비가 내리며 겉에 묻은 흙이 벗겨져 나가고, 드러난 글자가 범상치 않다는 생각에 고향친구인 본지 이창형 편집국장에게 연락이 갔던 것이 발견의 시초였다.

이에 본지는 평소 알고 지내던 이상준 포항시사 집필위원, 배용일 포항대학 교수에게 비문의 판독을 의뢰했다. 이후 이희특씨와 황인씨 등 포항시사 집필위원들이 속속 모여들며 현존하는 신라 최고비는 마침내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현재 발견 초기 제기됐던 `신라 지증왕 2년(AD 501년) 제작설`은 비석에 새겨진 글자체와 관직명 등을 근거로 최근 `신라 눌지왕 25년(AD 441년) 제작설`에 더 무게가 실리고 있다. 그러나 최종 결론은 지난 5월 시행된 국립대전문화재연구소의 보존처리 절차에 이어 직접적인 조사를 거친 올해 말께나 돼야 끝날 것으로 전망된다.

추정연도야 어떻든, 우선 이 중성리비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신라비라는 것에는 반론이 없다.

경주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실 박종익 실장은 “추정연도가 정확해지면 바로 중성리비에 대한 국보 지정이 이뤄질 수 있을 것”이라고 확언했다. 발견 당시에도 비문을 판독한 학자들은 “서체가 예서체로 고졸할 뿐 아니라 비의 모양도 냉수리비와 비슷한 점으로 보아 국보급 신라 고비로 판단된다”며 입을 모았다.

이에 본지는 사안이 심상치 않다는 생각에 이날 오후 9시께 1차 기사 송고를 마치고, 비문 내용이 대강 해독되기까지 자정이 넘도록 현장을 지켰다.

또, 비석의 맨 우측 첫 줄에 글자가 일부 떨어져 나간 상태라 `공사를 중지시키고 발굴작업을 해야 한다`는 의견을 학자들과 함께 하고, 이튿날 이른 아침부터 공사가 시작될 수 없도록 포항시 안상찬 행정지원국장, 이병기 문화공보과장, 김진규 학예사에게 연락, 현장을 확인시킨 후 신속히 조치토록 당부했다.

이어 다음날인 14일 본지에 비석의 발견 사실과 내용이 기사로 나가고, 중앙박물관 등 한국고대사학회에 소식이 전해졌으며, 포항시에서도 문화재청에 매장문화재 발견신고를 했다.

끝으로 15일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에서 박종익 학예연구실장을 현지에 보내 조사한 후 보도자료를 배포해 각 방송국과 전국 일간지 및 지방신문에 보도됨으로써, 전 학계와 일반 시민들에게 국보급 포항 중성리신라비 발견 사실이 널리 전파됐다.

본지와 함께 중성리비를 최초 연구한 배용일 포항대학 교수는 “아직도 그날 비문을 처음 봤을 때의 설레임이 떠오른다”면서 “포항시 승격 60주년이 되는 뜻깊은 해에 냉수리신라비보다 앞선 중성리비가 발견돼 신라 건국과 성장은 물론 영일만 포항지역의 고대사 구명이 더욱 활력을 받게 됐다”고 발견 당시의 감동을 전했다.

/신동우기자 beat082@kbmaeil.com

저작권자 © 경북매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