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홀로, 가족끼리, 연인끼리 `삼매경`

직장인들, 경기 스코어 내기 열풍

그리스전에서의 쾌승으로 한국 축구대표팀에 대한 기대치를 한껏 높였던 이 차장(40)은 “월드컵에서만큼은 객관적인 전력 차이를 생각할 수 없게 된다”며 혀를 내둘렀다.

그는 축구대표팀이 `남미의 강호`로 불리며 이번 2010 남아공 월드컵 대회의 강력한 우승후보로 손꼽히고 있는 아르헨티나를 상대하지만 축구팬들의 뜨거운 응원에 힘입어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그러나 기대는 무참히 깨지고 `거금` 10만원을 잃는 불운까지 떠안아야 했다. 직장동료와의 스코어 맞히기 내기에서 한국이 2대1로 이길 것이라고 호언장담했던 탓이다. 안타깝고 속이 상하다 못해 우리 선수들의 실책 장면들이 머릿속에서 자꾸 맴돌아 다른 업무에까지 영향을 끼쳐 적잖이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그런 이 차장. 벌써부터 나이지리아전 스코어 점치기에 바쁘다. 못 말리는 축구광이다.

축구팬들뿐 아니라 온 국민의 `생체 시계`가 남아공 월드컵이 열리는 6월에 맞춰지면서 평소 보기 드문 갖가지 풍경들이 펼쳐지고 있다. 4년마다 반복되는 월드컵 풍속도라지만 형편에 따라 변화되는 것도 있다.

갓난아이 둔 부부는 괴로워

포항시 북구 우현동에 사는 한 젊은 부부는 남들이 모두 한국 축구대표팀을 응원하기 위해 텔레비전 앞에 모여 앉아 있을 동안 8개월 된 딸아이의 울음을 그치게 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아이를 안고 있으면서도 신경은 온통 텔레비전에 집중돼 있는 남편은 아내가 나서주기를 원하지만 웬일인지 중요한 순간에 딸아이는 엄마는 밀쳐내고 아빠만 찾는다. 아이가 보채니까 엄마도 가만히 있을 수 없는 노릇. 이래저래 이들 부부는 월드컵을 즐기기 어렵게 됐다.

방콕족 “경기에 집중하고 싶어”

전국을 온통 붉게 물들이는 사람들. 월드컵 응원의 묘미를 제대로 즐기려는 이들이 길거리로 몰려드는 시각. 나만 혼자 조용히 경기 내용에 집중하고자 하는 방콕족도 있다.

축구 사랑이 결코 부족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축구 자체에 더 집중하고 싶기 때문이다. 물론 가족과 떨어져 혼자 지내는데 연인마저 없는 `친구 모으기 귀차니즘`의 싱글족도 해당된다.

포항시 북구 학잠동에 사는 최모(34)씨는 “집에서 혼자 보니까 흥은 떨어졌지만 대형 평면 TV 덕분에 선수들과 직접 호흡하는 느낌이었다”며 “나홀로 방콕족이라고 안쓰럽게 바라볼 필요는 없다”고 웃어 보였다.

`찜질방 응원` 또 다른 재미

그리스전이 열리던 지난 12일 저녁 직장인 김모(27)씨는 모처럼 여동생과 함께 동네 찜질방을 찾았다.

회사 일이 바빠서 한국대표팀의 첫 경기를 신경 쓰지 못했던 김씨는 주말을 맞아 찜질방을 찾은 여러 손님들과 함께 텔레비전 앞에 모여 앉아 “대~한민국”을 목청껏 외쳤다.

김씨는 “처음에는 조용히 TV를 시청하던 손님들도 한국이 첫 골을 넣자 흥분하기 시작했다”며 “나중에는 옆자리에 있던 난생 처음 본 사람과 마주 보며 손뼉을 치게 되더라. 길거리 응원과는 또 다른 매력이 있었다”고 말했다.

월드컵 응원 데이트도 `짜릿`

아르헨티나전이 열리던 지난 17일 저녁 포항 북부해수욕장 인근에 있는 한 카페.

20대 젊은이들이 주로 모여 응원을 벌이고 있다. 경기 초반 한국이 아르헨티나에게 밀리기 시작하자, 곳곳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이 와중에도 이날 경기보다 상대에게 더 집중하며 닭살 애정 행각을 벌이는 커플들이 주위의 부러움과 시샘의 눈길을 받아야 했다.

붉은색 커플룩으로 연인 사이임을 공개적으로 드러낸 이들에게 월드컵 응원전은 짜릿한 흥분과 즐거움이 가득한 이색 데이트 장소로 안성맞춤이다.

4년마다 한 번씩 오는 기회를 놓치기 아까울 터. 낯선 사람과도 얼싸 안고 기뻐할 수 있는 분위기인데 연인들은 오죽할까.

/김명은기자 kme@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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