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우영의 삼국지 (애니북스, 2007) 전집을 샀다. 아들녀석 수면용 도우미 책으로. 한데 웬 걸, 녀석은 시시해서 못 읽겠단다. 만화로 된 건 학교 도서관에서 다양한 버전으로 질리도록 읽었다나. 그러더니 요즘은 이문열 버전으로 조금씩 읽기 시작한다. 이문열 삼국지는 삼 년 전 녀석이 6학년 때 샀다. 책꽂이 너무 높은데 있어서 여태껏 못 읽었다는 합당한 이유가 있었지만, 실은 지 아무리 책 좋아하는 녀석이라도 6학년이 읽기엔 무리일 것 같아 그간 권하지 않았었다. 시시하다는 고우영 삼국지 대신 슬며시 제 방 책상 위에 가져다 놓았더니 읽기 시작한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삼국지 다양한 버전의 그 어떤 것도 끝까지 읽은 적이 없다. 무지를 면하기 위해서 억지로라도 만화 버전인 고우영 삼국지부터 야금야금 읽기 시작한다. 그러고 보니 아들 읽으라고 샀다는 건 핑계이고 내가 읽고 싶어서 산 것이 돼버렸다. 하루에 한 권씩, 한 개씩의 단상만 건져도 좋겠다는 심정으로 읽는다.

1권에서는 쪼다 한 명과 십상시를 발견한 걸로 만족이다. 고우영식으로 유비 쪼다를 말하려는 건 아니다. 사실 유비가 쪼다인지 아닌지는 별로 중요하지도 않다. 하기야 적벽대전 영화에서도 그렇게 보이긴 했다, 누구나 유비 같은 사려 깊은 소심증이 드러날 때가 많으니 차라리 그건 인간적인 것에 가깝다. 고우영이 오죽하면 책상 앞 펜대 든 자신을 그려놓고 유비 쪼다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너스레를 떨겠는가.

십상시 환관들 바지자락(?)에 휘둘린 영제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쪼다였다. 십상시는 삼국지 배경이 된 후한말 영제 때에 정권을 잡아 조정을 농락한 10여 명의 중상시, 즉 환관들을 말한다. 십상시들은 많은 봉토와 권력을 지녀 그 위세가 대단했다. 특히 그들의 곁에서 훈육된 영제는 십상시의 수장인 장랑을 아버지, 부수장인 조충을 어머니라 부르며 따랐다니 쪼다의 반열 중에 가히 황제급이라 할 만하다.

보편적 인간 속성은 자고로 권력 지향적이다. 권력에 무심한 이들조차 그 무심함에 대해 떠들기를 좋아하니 그 실체야말로 요상하기 이를 데 없다. 절대자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그 속성을 직접 체험한 십상시들은 거세된 남성성을 보상받기 위한 방법으로 권력을 탐했는지도 모른다. 여자 없는 설움을 돈과 권력으로라도 위안 삼고자 했을 것이다.

후한서 환자열전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부풍 사람 맹타는 재산이 많았으며, 장양의 종과 친구가 되어, 자주 찾아 선물을 하며 안부를 묻는데 아낌이 없었다. 종들은 모두 그가 덕이 있다고 여겨서 맹타에게 특혜로 원하는 걸 물었다. 맹타가 `저는 당신들이 나를 위해 절을 한 번 해주기를 바랍니다`라고 대답했다. 어느 날 노비감독관이 여러 노비를 이끌고 길에서 맹타에게 절을 하고, 마침내 맹타의 수레가 다른 방문객을 제치고 장양 집 문안으로 들어갔다. 빈객이 모두 놀라, 맹타가 장양과 아주 친하다고 여겨, 진귀한 물건을 그에게 선물하였다. 맹타는 이것을 나누어 장양에게 선물하니, 장양이 크게 기뻐하여 마침내 맹타를 양주자사로 삼았다.”

권력에 파생되는 이런 코미디 같은 에피소드야말로 권력의 속성을 제대로 통찰한다. 주인이 왕이면 그 집 종도 왕이다. 처세에 능한 저마다의 `맹타`들은 어디를 공략해야 그 권력 가까이 갈 수 있는지를 제대로 안다. 비루하나 현명하기(?) 그지없는 맹타들의 맹렬한 줄서기. 이게 현실이고, 정치이고 삶이다.

사람마다 다양한 버전의 삼국연의를 읽는 의의가 이런 데 있는 모양이다. 현재를 해석하고 자신을 추스르거나 단단하게 만드는 것. 누군가의 충고 없이도 삶에 대한 주석을 스스로 달 수 있는 것. 이게 고전 읽기의 재미와 힘이 아닌가 싶다. 비록 쉬운 만화 버전이라도 읽는 횟수가 늘어날 때마다 한 개씩만 머리에 담아보자. 그렇게 도돌이표 하다 보면 얼추 내 무지를 자각하면서도 내 삶의 방향타를 조금은 굳건하게 잡을 수 있지 않겠나.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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