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들 처마실 술을 내가 왜 사는데?` (56쪽)

조두진의 `아버지의 오토바이`(예담, 2009)에서 주인공인 아버지 엄시헌은 동료에게 저처럼 쏘아붙인다. 술자리 동석을 권하는 동료의 호의를 묵살하는 융통성 없는 소갈머리의 소유자. 엄시헌에게 밥벌이의 비루함과 숭고함은 오직 가족을 위해서란다. 가부장적 책임감은 원만한 사회성에 앞서는 변명이 될까? 이런 의문이 책장 마지막까지 함께 한다.

오직 내 새끼를 위한 맹목적 부성을 이해받아야 하는 이야기. 이 소설의 명백한 존재 이유다. 엄시헌에게 밖으로 이해타산을 따질 수밖에 없는 건, 안에 있는 내 가정, 특히 자식 둘을 건사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엄시헌의 부성애는 너무 가족 지향주의적이다. 버트란트 러셀이 말했다. `행복의 비결은 되도록 폭넓은 관심을 가지는 것, 그리고 관심을 끄는 사물이나 사람들에게 적대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되도록 따뜻한 반응을 보이는 것이다.` 라고. 안과 밖의 긍정적 환유가 없는 삶이란 무의미하다. 부성(父性)의 속성이 아무리 맹목적이라 해도 주변을 돌아볼 여유 정도는 있어줘야 한다.

엄시헌은 살아생전 내 아버지의 삶과 닮아 있기도 하고 다르기도 하다. `인부들이 먹다가 남긴 반병쯤 되는 소주를 비우`(63쪽)는 알뜰한 쩨쩨함 같은 건 이해된다. 그 시대를 건너온 서민 아버지들이라면 누구나 그랬음직하다. 그리하여 지난한 시대를 거쳐 왔던 아버지들의 실존적 초상은 자라나는 세대에겐 치욕의 저장고가 되기도 했다. 그 간접 고통이 주는 풍경에서 벗어나기 위해 누군가는 골방에서 글을 쓰거나 이어폰으로 귀를 틀어막곤 했던 것이다. 단절이나 침잠은 누가 뭐래도 경제적 고통이 주범이다. 그렇다고 내 안위를 위해 타인의 고통을 이용해도 될까? 내(가족)가 살기 위해 타인에게 상처를 줘서도 안 되고, 이타적이기 위해 그 고통이 가족을 향해서도 안 된다는 것 아닐까.

구차할 정도로 검약했던, 그래서 언제나 내 삶의 괄호 밖이기를 원했던 내 아버지가 결정적으로 엄시헌과 다른 것은 타인에 대한 배려였다. 가진 것보다 궁색함을 표방했던 내 아버지는 결코 인색한 사람은 아니었다. 곤고한 아버지 삶의 끄나풀에서 벗어나고자 그토록 갈망했으면서도 당신을 온전히 원망할 수 없었던 건 세상에 대한 이런 열린 방식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세상과 가족에 대한 도의를 동시에 감내했던 내 아버지식 삶이 더 온당하다고 느끼는 건 가족 제일주의를 표방한 엄시헌의 비틀린 아버지 상 때문일 것이다. 야만적 비루함이 감도는 엄시헌의 부성애는 공감해야 마땅한 것일까? 정신 지체아인 큰아들과 둘째놈의 공부를 위해서라면 술 한 잔 사면 안 되고, 동료들을 상대로 술집을 열고, 도박장을 개설해도 되는 것일까?

시종일관 담담하게 이어지는 이야기 속에 엄시헌의 아내 또한 없다. 아버지 처세의 곤고함을 강조하다 보니 어머니 부재는 그리 중요한 게 못됐다. 가족을 먹여 살린다는 명분이 있지만 그건 가부장적 권위가 부여한 또 다른 폭력에 지나지 않는다. 엄시헌의 가족사랑은 아내보다는 자식들에게 더 할당되었다. `가족 먹여 살리기 프로젝트` 그 어디에도 조력자로서의 아내 자리는 충분히 배려되어 있지 않다.

부성애의 실체가 비루하고 던적스럽다는 것을 강조하다 보니 실재했던 우리 아버지들의 초상을 너무 한쪽으로 몰아 부친 감이 없지 않다. 가족을 건사하기 위한 아버지의 노고는 위대했으나, 꼭 엄시헌의 방식일 필요는 없다고 본다. 가부장적 책임의식이 자신의 비굴하고 야비한 삶을 변명해줄 순 있어도 그게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엄시헌처럼 살지 않아도 자식 교육시키고, 사람 도의 지키며 사는 이들이 훨씬 많다. 엄시헌 자체의 부조리를 독자에게 이해시킬 때 몸 성치 않은 큰아들을 태운 엄시헌의 오토바이는 좀 더 자유롭게 속도를 낼 수 있을 것이다.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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