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흡인력 있는 소설 한 편을 만났다. 정유정의 `내 심장을 쏴라` (은행나무, 2009)이다. 내 부러운 눈길은 이미 뒷면 출판 정보를 읊고 있었다. 내가 산 책이 14쇄이니 출간 날짜에 비해 잘 팔리는 편이다. 신예작가로선 날개를 단 셈이다.

읽으면서, 좀 더 압축했더라면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300여 페이지를 훌쩍 넘기는데, 200 페이지 정도로 줄이는 게 나았을 것이다. 작가의 시선이 옹골차 한 장면에 너무 많은 사건을 담으려 하다 보니 가독성이 떨어질 수밖에. 이런 바람은 독자로서의 작은 불만일 뿐, 진실로 내가 하고 싶은 얘기는 소설적 재능이 빼어난 작가라는 것. 그 성과가 훈련의 산물이 아니라 태생적 요청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에 이르러서는 절망 섞인 부러움이 인다.

구성 상 `내면화된 단문`을 겨냥하는 단편과 달리 작가의 문체는 `행동체 단문`이다. 이야기 흐름을 따라 짧은 호흡으로 손끝을 놀릴 뿐인데, 그게 문장이 되고 이야기가 되고 끝내 독자의 심장을 향해 뭔가를 겨냥한다. 무엇을 보다는 어떻게 위주로 쓰는 단편을 읽을 때 느끼는 갑갑함이 없다. 생동감 있는 문장은 일정 시점을 지나면 술술 읽힌다. 예단컨대, 작가는 아포리즘을 남발하거나, 내면을 낭창하게 읊조리는 작가는 되지 못할(않을!) 것이다. 장편에서 독자를 효과적으로 끌어들이는 방법으로 아포리즘이란 칵테일을 적절하게 활용한다. 하지만 그미는 인간 존재의 근원 같은 것을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지 않아도 용서된다. 대신 블랙유머와 눙치는 눈썰미와 앙다문 입 속에 예리한 칼날을 숨기고 있으니까.

어지간한 작가다. 주인공들의 탈출기 한 장면, 특히 손목시계로 만든 흉기 장면을 그리면서 이십 여 페이지씩이나 녹여낸다. 왜 그래야 하는지에 대한 독자로서의 불만은 접어두고라도, 그런 줄줄이 사탕식 연결이 현장성을 획득하고 있다는 것, 세밀하고 자연스럽다는 것, 이런 것들이야말로 작가적 저력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손끝에 다음 문장이 스무고개처럼 물려 있고, 혀끝에 다음 대사가 칡넝쿨처럼 휘감겨 오는 것이다. 작가가 글을 짓는 게 아니라 글이 그저 이야기를 잣는다고나 할까? 이런 걸 작가적 재능이라는 말 대신 뭐라고 표현할 수 있나?

그렇다면 재능 없는 자들은 쓰기를 그만 둬야 할까? 재능에 비견할 바는 아니지만 `엉덩이 굳히기` 라는 미련한 방법도 있으니 그리 절망할 일은 아니다. 재능 있는 자 쓰기를 즐기고, 딸리는 자 다만, 엉덩이 의자에 붙여라. 그리하여 최선을 다해 손끝 바지런히 놀릴지어다. - 이런 절망스런 감상문을 쓰게 만드는 작가이다.

적어도 어떻게 쓰냐를 고민할 필요가 없는 작가일 것이다. 그저 무엇을, 왜 쓸 것인가만 생각하면 되는 작가로 보인다. 이건 독자로서 신진 작가에게 보내는 최대의 찬사이다. 그미의 성공 조짐은 앞에서도 말했듯이, 내공의 문제라기보다 성향의 문제라고 본다. 만들어지고 다듬어진 작가가 아니라 예견된, 될 성 부른 떡잎이다. 복을 타고난, 천상 작가를 만난 기쁨은 내 절망을 재촉한다.

읽는 잔재미도 쏠쏠하다. “다들 같은 이름을 쓰는 소식통을 정보 출처로 댔다. `정통한` 소식통이라고.” (130쪽), “현선엄마는 현선이를 불렀고, 나는 애타게 잠을 불렀다.”(130쪽) 영화로도 제작된다니 작가의 의도와 잘 맞아떨어진 게 아닐까? 읽을수록 디테일한 장면들은 영화를 염두에 둔 혐의가 짙다.

불만이 있다면, 넘치는 현장감과 모자람 없는 묘사가 번뜩임에도 가끔씩 독해력이 딸리는 부분이 있더라는 것이다. 필시 독자의 자리를 자신과 동일시한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리라. 친절한 설명은 독자를 모독하는 것이라 해도 의도하지 않게 생략된 부분이 과도한 현장을 밀어냈더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랬더라면 가열찬 가독성을 보장하지 않았을까 하고 인상 한 번 써보는 것이다.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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