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십대 시절 나는 제법 학교 도서관을 드나들었다. 그 때는 도서기록카드란 게 있었다. 책 뒷면, 붙여진 대출용 봉투 안에 기록지가 있었다. 빌린 이의 이름과 빌린 날짜, 반납일자 등이 기록지에 흔적으로 남았다. 누구라도 책을 빌렸다면 그 목록을 훤히 들여다 볼 수 있는 시스템이었다. 어느 날 공대생 친구 녀석이 말했다.

“도서 기록 카드에 니 이름 와 그리 많이 등장하노?”

반색하는 녀석이 나는 하나도 반갑지 않았다. 반사적으로 내 몸은 움찔했다. 도둑이 제 발 저렸던 것이다. 빌린 책 중에서 마르셀 프루스트의 사진을 훔친 때문이었다. 혹시라도 도서대여 담당자가 추적 끝에 잘려나간 작가 사진들을 돌려달라고 쫓아올까 두렵던 차에 친구녀석의 그런 발언에도 움찔했던 것이다.

책의 주요 정보를 개인적 목적으로 취득하는 행위는 부도덕하다 못해 파렴치하다. 하지만 그런 치기 역시 책에서 배웠으므로 내 죄는 반감되어야 마땅하다(!) 그 시절, 내 설익은 이성과 감성을 쥐락펴락했던 전혜린이란 에세이스트가 있었다. 너무 오래 돼 지금은 확실하지 않지만, 그녀가 독일 유학시절 도서관에서 필요한 인물 사진을 슬쩍했다는 고백을 읽으면서 괜히 멋지다고 생각했다. 나도 따라해 보고 싶었다. 그 때 치기어린 장난의 결과물이 프루스트의 사진 불법 점유였다.

그 때 빌린 책이 아마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쯤이 되겠다. 프루스트의 그 책은 어렵다기 보다 읽기에 지겨웠다. 나중에 그 원인을 알아냈다. 프루스트 특유의 만연체 문장 때문이었다. 끝날 줄 모르는 접속사와 연결어에 지쳐 책을 내던지게 만들었다. 해서 누군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완독했다는 소식이 들린다면 마구 안아주고 싶은 심정이다.

그런데, 이게 웬 반가운 일인가? 만화로 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열화당, 1999)가 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벌써 5권까지 출간되었단다. 곧장 주문한 네 권의 책이 어제 배달되었다. 첫 번째 권이 스완네 아저씨 집이 나오는 콩브레 마을 편이다. 그 유명한 마들렌느 과자 부분이 나오는 장면을 찾으면서 심장이 떨렸다. 주인공 마르셀이, 엄마가 권하는 홍차에 찍은 마들렌느 과자를 먹으면서 어린 시절의 기억을 되살리는 장면이다. 콩브레 마을의 일요일 아침, 이모가 권하던 그 마들렌느 맛이 겹치면서 마르셀은 완전무결하게 제 어린시절을 글로 복원하게 된다.

만화가 아닌 번역본을 읽을 때도 나는 몹시 궁금했다. 마들렌느 과자가 대체 어떤 것일까? 막연히 타원형 비스킷과 비슷할 거라고 상상하곤 했다. 허겁지겁 펼쳐본 15쪽의 마들렌느 과자 모양은 예상 밖이었다. 우리나라로 치자면 국화빵 같은 친숙한 느낌이긴 하지만 뭐랄까, 나로서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과자모양이었다. 그토록 궁금했던 마들렌느 과자를 그림으로 확인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내겐 이 책의 효용으로서는 충분했다. 텍스트 안에서 독해능력이나 상상력이 제한받을 때, 만화라는 보조 장르야말로 그 욕구를 채울 수 있는 적절한 수단임을 체험한 하루였다.

`감미로운 행복감이 나를 엄습해와, 어찌 된 영문이지 나를 고립시켜 버렸다. 도대체 이 극도의 희열감은 어디서 온단 말인가? 나는 이 희열감이 홍차와 과자 때문에 생겨나긴 했지만, 단순한 감각의 차원을 뛰어넘는, 전혀 다른 성질의 것이란 느낌이 들었다. 내가 도달하려는 본질은 과자가 아니라, 바로 내 안에 있었다. 홍차에 적신 과자가 뭔가를 일깨운 것이다.`(15쪽)

마들렌느 과자 장면을 지상 중계해보자. 마르셀이 홍차 김 모락모락 피어나는 식탁 곁에 다가온다. 마들렌느 과자 하나가 담긴 접시 가까이 마르셀의 손이 다가간다. 스푼에 뜬 홍차에 마들렌느 과자 조각을 담근다. 왼쪽 손에 스푼을 든 마르셀은 콧수염 가까이 스푼을 들이대고 그 향을 음미한다. 다시 한 조각을 떼어 스푼 홍차에 찍는다.

각설하고, 마들렌느 과자 모양이 궁금한 사람은 만화로 된 이 책 한 권으로도 마르셀처럼 극도의 희열감에 온몸을 떨게 될지도 모른다.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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