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오신객원 논설위원로타리 공공이미지 코디네이터
인도를 여행하기 좋은 계절이 돌아왔다. 불교를 국교로 떠받들었던 신라·고려는 물론이고 지금도 한국여행객은 여전하다. 1세기 경 히말라야와 미얀마· 윈난성을 넘는 두 길로 중국에 들어온 불교는 그로부터 300년 쯤 지나 우리나라로 넘어왔다.

고구려·백제·신라 가운데 불교를 가장 늦게 받아들인 해동 끄트머리나라 신라가 상대적으로 불법의 세계를 여는 데는 더 진취적이었다. 신라의 골품제가 당나라 유학을 부추겼다. 골품제 벽을 넘지 못했던 많은 청년들이나 왕권에 반발, 마을이 싹쓸이(모량부)되는 난을 피하고 목숨을 부지하기위해 당으로 건너간 젊은이들이 많았다. 모량부 출신으로 당나라에 건너가 현장법사로부터 의발을 전수받은 원칙스님이 그 대표적 예다. 원칙스님의 학문은 후일 해동 불교가 대승불교로 가닥을 잡는데 크게 영향을 끼쳤다.

신라승 가운데 가장 이름을 떨친 혜초는 고향 계림을 떠나 수많은 밤을 홀로 보냈고 사막에선 먼저 걸었던 구도승의 흔적인 해골바가지를 보고 구법여행의 길 표준을 잡은 해동 최초의 세계인이었다. 그해 8월8일 혜초는 쿠시나가리 열반당에서 먼저 다녀간 당의 현장법사가 그랬던 것처럼 부처의 발치에 엎드려 퍽퍽 소리 내어 한없이 울었을 것이다.

혜초는 다른 구법승 80명과 하께 당나라 광저우에서 배를 타고 동천축에 도착, 구법여행을 마무리하기까지 4년이 걸렸다. 기록은 없지만 돌아온 도반은 14명 뿐 이었다고 한다. 장안에서 머물다 보리사에서 입적한 혜초는 왕오천축국전이란 세계 4대 여행 기서를 남긴 구법승이자 천축에서 살아 돌아온 해동 최초의 첫 신라인이다.

혜초가 남긴 왕오천축국전이 세상에 알려진 건 겨우 100년이 조금 넘는다. 불교가 동아시아로 들어오는 통로였던 중국 감숙성 둔황 막고굴은 천 년에 걸쳐 600동굴, 2천400위의 불상이 조성됐다. 17호 굴에 남았던 이 두루마리의 실체가 펠리오 손을 떠나 세상에 밝혀지기까지 숱한 세월이 흘렀다.

2500년 전 열반에 들기 전 부처는 이런 말을 남겼다. “걱정말라. 항상 기억하고 찾아야 할 네 곳이 있으니 태어난 룸비니와 깨달음을 얻은 보다가야, 법을 처음 설한 바리나시(사르나트), 쿠시나가리다. 이 네 곳을 돌아보고 내 가르침을 떠 올릴 수 있으면 나를 다시 만나 것과 다름없다”했다.

나는 늘 거기에 있을 것이다. 위대한 상속을 포기했고 한 번도 남에게 화를 내지 않았던 부처의 이 마지막 가르침은 열반 후 최상의 수행법이 됐다. “모든 것이 덧없다(諸行無常)” “부지런히 정진하라(不放逸 精進)”는 부처의 말대로 순례자의 행렬은 지금도 끊이지 않는다.

이 길은 천년을 넘겨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중인도 바리나시에서 본 초전 법륜상의 아름다움은 그 때나 지금이나 같다. 바리나시 다투크 스투파는 부처의 다섯 제자 설법을 기념, 3세기 부처의 법을 인도 전역에 떨친 아쇼카 왕이 세웠다. 석주가 이고 있는 4마리 사자상(고대 인도의 상징)도 여전히 고고하고 아름답다.

보리수나무 아래서 부처가 깨달음을 얻은 보다가야 대찰 마당 50m높이 대탑 앞에서 1300년 전에 서있었던 혜초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깨달음을 얻은 부처의 첫 걸음을 기념하기 위해 바로 그 자리에 새겨놓은 큰 발자국은 수행보다 더 힘든 고행 길을 증명하는 산 증표이다. 세월의 무상함을 몸으로 겪은 부처는 서 있거나 앉아 있거나 삼보일배 오체투지를 하는 그 자리가 깨달음으로 가는 자리라고 말 했을 것 같다.

인도불교는 7세기부터 쇠락의 길을 걷는다. 한 때 천명도 더 묵었을 `날란다` 대학은 7세 이후 문을 닫았다. 그렇지만 갠지스는 예나 지금이나 죄를 씻는 영혼의 정화의식 장소 같은 곳이다. 불교도이던 힌두교도 이던 인도인들이 생을 마감하는 최고의 장소를 비라보는 나그네의 심정도 항하사의 모래알처럼 물처럼 유장하게 흐른다.

저작권자 © 경북매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