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포 / 포항기계중앙교회 담임목사

성탄의 계절이다. 일 년의 끝자락이 왠지 아쉽다. 기다림은 누구에게나 특별한 의미가 있다. 기다림이란 만남을 전제하지 않아도 행복하다. 그래서 어떤 시인은 만나는 것보다 기다리는 시간이 더 좋다고 했다. 인간에게 기다림이란 기쁨과 불안이 맞물려서 돌아간다. 어떤 사람에게는 기다림이 설레임일 수 있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기다림이 고통일 수 있다.

12월은 기다림의 계절이다. 그래서 왠지 가슴이 설렌다. 뭔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다. 그러나 매년 성탄을 맞이하지만 우리가 어떻게, 무엇을 준비했느냐에 따라서 성탄의 의미는 달라질 수 있다.

우리 주님은 냄새 나고 지저분한 마구간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의 모습으로 오셨다. 하늘이 땅이 되고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날, 그분은 우리 인간에게 최고의 선물이 되어 오셨다.

어떤 사람에게 친구가 셋이 있었다. 첫 번째 친구는 그가 가장 좋아하고 신뢰하는 친구였다. 두 번째 친구는 좋아하기는 했지만 첫 번째 친구보다는 소중하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세 번째 친구는, 친구라고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별로 관심을 갖고 있지는 않았다.

어느 날, 그가 먼 길을 떠나게 되었다. 그는 가장 소중히 여기는 친구에게 함께 가자고 부탁했다. 그러나 그 친구는 거절했다.

두 번째 친구는 성문 앞까지만 같이 가주겠다고 말했다. 마지막 세 번째 친구를 찾아갔다. 그 친구는 말했다. “기꺼이 함께 가주겠네. 어려움을 함께 이겨 나가는 것이 친구 아니겠나?”

이 이야기에서 첫 번째 친구는 재산 즉 물질이다. 재산이 제아무리 많아도 죽음이라는 먼 길을 떠날 때에는 남겨 두고 빈손으로 가야 한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입게 되는 수의에는 주머니가 없다.

두 번째 친구는 사랑하는 사람이다. 사랑하는 사람 역시 묘지까지는 따라가 주지만 그 이후에는 혼자 가야 한다. 아무리 사랑한다 해도 결코 같이 죽음까지 동행하지 못한다. 부모도, 가족도 그 어떤 친구도 죽음 앞에서는 이별을 해야 한다.

세 번째 친구는 선행이다. 선행과 자선은 평상시에는 눈에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마지막인 죽음까지 동행을 해준다.

신약성경 마태복음 25장에는 최후의 심판에 관한 말씀이 있다. 거기에 보면 선행이라는 친구의 위력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알 수 있다. 죽음의 길까지 함께 쫓아가서 심판 때 그를 변호해 주고 천국으로 인도해 주는 친구는 바로 선행이었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태복음 25장 40절)

신앙인에게는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구세주로 이 세상에 오심을 기다리는 시간은 어쩌면 우리에게 가장 희망적이고 행복한 순간이다. 우리는 아기 예수로 오신 주님을 만나기 위해서 자기를 돌아봐야 한다. 진정한 회개는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한 성찰(省察)이다. 진정한 성찰을 통해서 마음의 변화, 정신의 변화, 삶의 변화를 가져오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첫 번째 성탄을 맞이하는 마음의 자세다. 물론 “인간은 본래 잘못을 저지르는 인간이다.”라는 라틴어 속담이 있지만 이제까지 나 중심의 생활에서 벗어나 이제는 이타적인 삶을 살도록 노력해야 한다. 예수님의 삶이 바로 이타적이고 희생적인 삶이었기 때문이다. 이번 성탄절에는 순간의 기쁨을 주는 가짜 주(酒)님을 멀리하고, 진짜 영원한 기쁨을 주는 주(主)님을 맞이하기 위해 시간을 보내는 것은 어떨까.

성탄의 계절에 주님이 가장 기뻐하는 것은 무엇일까? 주님께 많은 물질을 드리면 기뻐하실까? 주님께 귀한 선물을 드리면 기뻐하실까? 아니다. 우리 주변에 지극히 작은 사람에게 한 것이 바로 주님께 하는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그렇다 법적으로 보호받지 못한 사회적인 약자들, 세상 사람들로부터 밀려난 하 류 인생들을 섬기는 일이야말로 성탄을 기다리는 자세일 것이다. 세상에서 귀하다고 생각하는 물질이나 사랑하는 사람도 결코 죽음까지 동행할 수 없지만 선행과 자선은 죽음까지도 동행한다는 사실을 성탄절 아침에 깨우쳐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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